집 나간 고양이 찾는 주인공들

학살 당한 ‘망치’… 범인은 이웃

애타게 부르지만 못 찾은 ‘모루’

‘몸 기울여’ 상실의 시간 그려내

권순대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
권순대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

연극 ‘몸 기울여’(김윤식 작, 신진호 연출, 1월23일~2월1일, 대학로예술극장 소극장)는 폭력과 상실에 관한 이야기이다. 그 중심에 고양이가 있다. 모루와 망치가 집을 나간 지 삼 일이 지났다. 홍인과 그의 전처 서라가 모루와 망치를 찾아 나서면서 이야기는 시작한다.

가상의 소도시 도암읍이 배경이다. 그중 정육점과 빈터가 주요 장소이다. 정육점은 홍인과 우석의 일터이자 유년 시절부터 함께한 친구들이 가끔 모이는 곳이다. 군수인 동파, 경찰인 두영, 상인회장인 병민이 그들이다. 정육점의 모임은 그래서 과거와 현재를 연결하는 에피소드가 된다. 유년 시절의 추억은 곱씹을수록 유대가 쌓이는 법이다. 좁아터진 읍내에서는 더더욱 그럴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누군가가 비밀의 상자를 열기 전까지는 말이다.

빈터는 군사 기지가 다른 도시로 떠나고 남은 자리다. 상가가 들어서고 개발이 이루어지길 바라지만 폐허로 방치되고 있다. 그 빈터에 뭐가 들어올지에 따라 이해관계가 달라진다. 작은 읍내에 사는 사람들이라고 해서 개발과 성장 신화에 대한 선망이 왜 없겠는가. 군수인 동파에게 힘이 쏠리고 시선이 모이는 이유는 삼척동자도 안다. 빈터에 새로운 주인이 생겼다. 고양이들이 그곳을 차지하면서 말이 돌기 시작한다. 빈터가 흉물로 방치되어서는 안 된다는 주장에 힘을 보태는 사건이 터지고야 만다. 죽은 고양이가 발견되기 시작한다. 자연사로 보기에는 너무나 처참한 모습이다. 모루와 망치를 찾아 나선 홍인과 서라의 눈에 망치가 죽은 채 발견된다. 서라는 인간이 망치를 학살한 게 틀림없다고 확신한다.

고양이 학살에 관한 가장 유명한 사례는 단연 로버트 단턴의 ‘고양이 대학살’에 실린 이야기이다. ‘그들이 제일 먼저 찾는 것은 안주인의 털고양이 그리스이다. 레베이예가 옆구리를 갈겨 기절시키고 제롬이 끝장을 낸다. 그리고는 레베이예가 그 시체를 홈통에 집어넣는다. 사람들은 지붕 위에서 공포를 연출한다. 놀란 고양이들은 자루 속으로 뛰어든다. 어떤 놈들은 그 자리에서 살해된다. 다른 놈들은 인쇄소 전체의 즐거움을 위해 교수형에 처하도록 판결을 받는다’. 이 사례들은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고 로버트 단턴은 말한다. 암소로 샤리바리를 할 수는 없고 오직 고양이로 할 수 있을 뿐이라고 말이다. 샤리바리는 중세 이후 유럽에서 공동체의 규범을 어긴 자에게 가하던 의례적인 처벌 행위를 말한다. 지금은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나 당시에는 일종의 의례 행위였으며, 부르주아에 대한 저항의 의미도 담겼다는 해석이다.

연극 몸 기울여에서는 아무 이유 없이 행해진다. 그것도 반복해서. 한 번은 유년 시절이었던 과거, 또 한 번은 어른이 된 현재. 과거에는 또래 문화의 일종으로 행해졌다. 그들은 그렇게 비밀을 공유하는 사이가 되었다. 그런데 어른이 된 현재에도 계속하는 자가 있었다. 반복하는 폭력에서 놓여나지 못하고 여전히 그 사슬에 묶여 있는 자가 있었다. 괴물이 멀지 않은 바로 이웃하는 곳에 있었던 셈이다.

“어디 있니?” 이 말은 상실과 기다림의 시간을 간직하고 있다. 함께했던 존재와의 단절이 가져오는 분리의 시간은 어떻게 흐르는가. 아니 흐르기는 하는가. 상실의 시간을 견디기 힘겨운 까닭은 그 시간이 일상의 시간 저 너머의 장소에 닿아 있기 때문이다. 그곳에서 흐르는 시간은 늪과 같아서 헤아리기 어렵고 헤어나오기가 힘겹다. 모루와 망치를 찾아 나선 홍인과 서라의 시간이 그러하다.

몸을 기울여야 보이는 게 있다. 자세를 낮추고 웅크려야만 찾을 수 있는 게 있다. 홍인과 서라가 모루를 찾을 때, 전력을 다해 그 이름을 부를 때 둘의 몸 기울기는 얼마나 위태로웠던가. 뭔가를 잃고 난 이후에야 손을 내민다. 그것이 물건이든 사람이든 말이다. 그런데 상실한 이후에야 그 회복을 위해 몸을 기울인다면 얼마나 안타까운 일인가. 고양이에게 말을 걸려면 몸을 잔뜩 기울여야 한다. 그 사실을 고양이와 살아야만 알 수 있는 건 아니다. 연극에서 모루는 끝내 찾지 못하고 끝난다. 모루야. “어디 있니?”

/권순대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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