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자 보내 항복하자 “성곽부터 허물라”
바다 두려움속 난공불락 ‘넘사벽’
몽골 독촉에 고려軍 “왜 축성해서”
왕실, 성곽도 없이 11년후 환도
여몽항쟁 시기, 고려가 강화를 포기한다는 것은 항복을 의미했다. 1259년 6월, 임금 고종은 큰아들인 태자를 몽골에 보냈다. 강화에서 개성으로 다시 수도를 옮기겠다는 얘기를 전하기 위해서였다. 마침 그때 몽골은 고려를 완전히 손아귀에 넣기 위해 대군을 움직이던 차였다.
몽골군은 도중에 태자와 만난 뒤 진군을 멈추었다. 태자로부터 완전한 항복 의사를 전달받았기 때문이었다. 고려는 그동안 몽골의 계속된 항복 요구에도 강화를 요새 삼아 버텼다. 태자에게서 직접 분명한 항복 의사를 확인하기는 했지만 몽골은 조건을 내걸었다. 강화에 겹겹이 쌓은 성곽을 헐라는 거였다. 수도를 옮기기 전에 우선 성곽부터 없애야 항복으로 간주하겠다는 얘기였다.
여기서 우리는 당시 몽골군이 강화를 어떻게 여겼는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우선 몽골군은 강화를 둘러싼 바다를 무서워했다. 바다가 1차 난관이라면, 그 바다 건너 있는 강화의 성곽은 그야말로 난공불락의 요새였다. 바다에서의 싸움에도 자신이 없었지만 행여나 바다를 건넌다고 하더라도 성곽을 부술 수 있는 공성(攻城) 무기를 배로 옮길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침략자 몽골군 입장에서 강화의 성곽은 육지의 그것과는 차원이 다른 말 그대로의 ‘넘사벽’이었다.
고려 태자와 몽골군 장수가 도중에 만나 긴박하게 진행한 협상 과정과 강화 성곽을 무너뜨리는 장면이 ‘고려사절요’에 전한다.
대군을 이끌고 고려로 향하던 몽골군 대장은 송길(松吉)이었다. 군사를 멈춰달라는 태자의 요청을 고민 끝에 받아들인 송길은 주자(周者)와 도고(陶高) 등 부하 몇을 강화로 보내 성곽을 파괴하도록 지시했다. 어렵게 쌓은 성을 부수는 일은 고려군의 몫이었다.
우선 내성(內城)부터 헐었는데, 주자를 비롯한 몽골군이 너무 심하게 일을 독촉하는 바람에 고려 군사들이 괴로움에 시달리며 “이럴 거였으면 성은 왜 쌓았느냐”고 아우성이었다. 이때 성이 무너지는 소리가 큰 우레 같아 항간의 아이와 여자들이 모두 슬피 울었다. 몽골군 장수들은 외성마저 허는 걸 본 뒤에야 돌아갔다.
고려 왕실은 이렇게 하여 성곽도 없이 강화에서 11년을 더 보낸 뒤 1270년, 개성으로 환도했다.
몽골군이 그렇게도 싫어했던 강화도의 고려 성곽은 위치와 규모 등 많은 부분이 정확하게 드러나 있지 않다. 그렇다 보니 연구자마다 고려 성곽의 위치와 크기를 다르게 말하기도 한다.
고려의 강화 성곽은 셋으로 구분할 수 있다. 궁궐 조성 공사와 함께 그 주변을 두른 내성부터 쌓고 나서 강화대교 쪽 염하 해안가에 외성을 쌓았던 듯하다. 그 뒤로 외성과 내성 사이에 중성을 더했다. 모두 토성(土城)이었던 듯하다. 외성을 쌓은 것은 강화로 수도를 옮긴 지 5년 뒤인 1237년 10월이었다. ‘고려사절요’는 단순히 ‘강화에 외성을 쌓았다(築江華外城)’라고만 썼다. 외성을 쌓기 전인 1235년 12월에는 연강(沿江) 제안(堤岸)을 가축(加築)했다는 기록도 있다. 연강은 지금의 염하를 일컫는 것으로 보인다.
중성은 외성을 쌓은 지 13년이나 더 지난 1250년 8월에 마쳤다. ‘고려사절요’는 ‘비로소 강도에 중성을 쌓았다(始築江都中城)’고 기록했다. 강화를 강도라 칭하고, ‘비로소(始)’라는 말을 덧붙인 점이 눈에 띈다. 이 ‘비로소’라는 말은 여러 의미로 읽을 수 있다. 중성이 그다지 시급하지 않다고 판단해 더디게 일을 했을 수도 있고, 전략적으로 꼭 필요한 요충 시설이었지만 일이 힘들어 오래 걸렸을 수도 있다. 이 중성의 위치는 고식이 벌판에서 대문고개와 냉정고개를 거쳐 혈구산으로 이어지는 산등성이로 보인다. 17세기에 제작된 강화 지도인 ‘강도전도’에 보면 이 산등성이를 ‘토성(土城)이라고 표기해 놓았다. 지금, 그 토성 성곽이 무너진 자리는 등산로가 되어 길이 나 있다.
17세기 초 중국과 조선 지도인 ‘지나조선고지도’에는 내성과 외성의 둘레가 적혀있다. 이는 16세기에 편찬한 ‘신증동국여지승람’의 기록과 같다. 내성은 3천874척, 외성은 3만7천76척이라고 돼 있다. 내성은 1㎞가 조금 넘었고, 외성은 11㎞ 이상이었다. 조선시대에 외성과 내성을 새롭게 쌓았는데, 중성 터는 아직 방치돼 있다. 강화에 묻혀 있는 고려 성곽 연구를 좀 더 세밀하게 진행할 필요가 있어 보인다.
/정진오기자 schild@kyeongi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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