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대 과장된 전제 무시·내 기준 유지가 원칙
반도체 문제엔 크게 흔드는 트럼프식 안 맞아
정도 지키며 근거로 설명하는게 ‘진짜 정치’
협상을 하다 보면 상대가 터무니없는 말을 던질 때가 있다. “이게 싫으면 다른 데로 가라”, “이 조건 아니면 안 한다” 같은 말이다.
이때 많은 사람들이 실수한다. 상대의 말에 반응해 그 프레임 안으로 들어가 버리는 것이다. 상대가 “100만원 손해 보는데 그래도 싫으면 내가 1억원 줄게”라고 했다고 해서 “그럼 1억원을 기준으로 얘기하자”고 말하는 순간, 기준은 이미 상대가 정한 1억원이 된다.
그때부터 협상은 끝난다. 왜냐하면 내가 주장해야 할 기준(100만원)은 사라지고, 상대가 던진 과장된 숫자가 판을 지배하기 때문이다.
협상에서 가장 먼저 할 일은 단 하나다. 상대의 과장된 전제를 무시하는 것이다.
부당한 주장에는 두 가지 대응만 있다. 상대의 요구가 부당할 때 선택지는 딱 두 가지뿐이다. 첫째, 상대하지 않는다. 말이 안 되면 굳이 반응할 필요도 없다. 침묵은 때로 가장 강한 메시지다. 둘째, 상대한다면 기준을 내 기준으로 되돌린다. “그게 왜 부당한지”를 법, 제도, 관리 상태, 이미 정해진 절차로 설명한다. 감정이 아니라 근거로 말한다.
이 두 가지 외에는 없다. 분노하거나, 소리를 키우거나, 사람을 모으는 건 협상이 아니라 싸움의 신호다.
반도체 문제에 이 원리를 대입하면 답은 명확하다.
“반도체가 다른 데로 갈 수도 있다.” “여기 아니면 안 된다.” 이런 말들은 협상용 발언이지 현실 그 자체가 아니다. 그런데 이 말을 있는 그대로 받아서 “지금 당장 반도체가 떠난다”는 위기 프레임을 만들고, 시민을 동원하고, 촛불 집회를 열면 그 순간 협상의 기준은 완전히 바뀐다.
문제는 ‘부당하냐, 정당하냐’가 아니라 ‘누가 더 시끄럽냐’로 전환된다. 이건 협상이 아니라 상대의 수위에 말려드는 것이다. 조용히 설득할 수 있는 문제였다.
전기가 부족하다는 주장도 마찬가지다.
전기는 특정 지역에만 있는 게 아니다. 강원도에도 있고, 다른 지역에도 있다. 방법은 얼마든지 있다. 멀리 떨어진 시골 지역의 송전선은 그대로 두고, 이천에서 용인으로 들어오는 도심 구간만 지중화하고, 필요한 전력은 강원도 쪽에서 일부 끌어오는 방식 등등. 이건 소리 낼 일이 아니라 기술과 설계의 문제다. 조용히, 숫자로, 도면으로 설명하면 될 사안이다.
정치가 협상을 망칠 때 문제는 일부 정치인들이 이걸 자기 존재를 드러내는 무대로 만들어버릴 때다.
마치 자기가 막아서 반도체가 남아 있는 것처럼 말하고 실제로는 전임에서 이미 정리된 사안을 마지막에 와서 큰소리로 포장한다. 이런 순간 협상은 깨진다. 상대는 체면을 잃고, 행정은 경직되고, 결과는 늦어진다.
협상은 트럼프식으로 하면 안 된다. 트럼프식 협상의 핵심은 크게 던지고, 상대를 흔들고, 기준을 자기 쪽으로 끌고 오는 것이다. 그 방식은 상대가 약할 때는 통할 수 있다.
하지만 국가 간 협상, 산업 정책, 반도체 같은 문제에는 맞지 않는다. 이런 문제는 소리보다 지속성이 중요하고 위협보다 예측 가능성이 중요하다.
협상에서 지켜야 할 원칙은 첫째, 상대의 과장된 주장에 반응하지 말 것. 두번째, 내 기준(법·절차·기존 결정)을 끝까지 유지할 것. 세번째, 부당함은 감정이 아니라 근거로 말할 것. 네번째, 사람을 모으는 순간, 협상은 싸움으로 바뀐다는 걸 기억할 것. 다섯번째, 조용히 해결될 수 있는 일은 끝까지 조용히 갈 것이다.
협상은 이기는 기술이 아니라 기준을 지키는 기술이다. 반도체 문제도 마찬가지다. 어디로 간다, 못 간다는 말에 휘둘릴 필요가 없다. 그 얘기는 애초에 논의할 가치가 없는 전제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할 일은 단순하다. 왜 여기 있어야 하는지를 조용히, 반복해서, 근거로 설명하는 것이다. 그게 협상이고, 그게 진짜 정치다.
/한주식 지산그룹 창업자·경영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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