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함도 답사 간 다국적 순례단
스물여섯 성인 기념비를 보며
죽어야 한다면 ‘어떻게’ 중요
올바름 멀어져 산들 무엇하랴
에어서울 후쿠오카행 RS723편. 아침 7시20분발 비행기에 대려니 체력이 벅차다. 새벽 4시20분부터 서둘러 체크인 해둔 모바일 탑승권을 못 찾아 종이 탑승권으로 바꾸는 소동 끝에 출국에 성공한다.
나가사키, 한수산 장편소설의 무대 ‘군함도’를 찾아 나선 답사다. 재건, 준성, 우동, 사티야, 그리고 필자까지 불과 다섯 사람. 그런데 국적은 셋이나 된다. 한국, 중국, 스리랑카의 다국적 ‘순례단’이다. 후쿠오카에 기착하자마자 나가사키로 이동, 저렴한 APA 호텔에 여장을 푼다.
작가 한수산은 1980년대 필화 사건을 겪으며 일본에 체류했다. 그것이 계기가 되어 일제강점기 징용 간 이들을 그린 문제작 ‘군함도’를 썼다. 한수산은 가톨릭 신앙인이었고, 이 ‘군함도’는 일종의 ‘가톨리시즘’의 맥락에서 접근해 볼 수 있다.
이번 다국적 순례단의 나가사키 첫 답사지는 ‘니시자카’ 순교지다. 나가사키역에서 멀지 않은 언덕, 옛날에는 바다를 향해 돌출한 곶이었다고 한다. 스물여섯 성인 기념비, 스물여섯 성인 기념관, 그리고 성 필립보 교회로 이루어져 있다.
조각가 후나고시 야스타케가 부조한 스물여섯 성인의 청동 기념비는 어떤 설명에 의하면, ‘무상의 기쁨을 안고 하늘에 올라가려고 하고 있는 26명의 순교의 순간을 나타낸 것’이다. 무상의 기쁨을 안고 하늘에 올라가려고 하는, 이라! 어떤 신념이 있고서야 죽음은 무상의 기쁨이 될 수 있을까?
이 스물여섯 성인은 ‘다국적’군이었다. 일본 사람, 스페인 사람, 멕시코 사람에, 인도 사람까지 있었다. 멕시코 사람 ‘성 필립보 데 헤수스’는 필리핀에서 멕시코로 돌아가는 중에 풍랑을 만나 시코쿠에 표착, 교토에 갔다 ‘불행히’ 체포된다. ‘우연’이 그를 ‘필연’의, 성인의 길로 인도했다.
필립보 성인과 함께 처형된 사람들 중에 열다섯 살밖에 안 된 소년이 있었다. ‘성 토마스 고자키’는 아버지와 함께 체포되어 어른들과 꼭 같이 왼쪽 귓불이 잘리고 겨울에 나가사키까지 맨발로 1천킬로를 걸어가 처형당한다. 이 고자키가 히로시마에서 쓴 편지에는 자신의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남겨질 두 동생과 어머니만을 걱정하는 내용이 담겨 있다.
처형된 사람들 중에는 불과 열두 살의 ‘성 루도비코 이바라키’도 있었다. 두 삼촌과 함께 체포된 이바라키는 니시자카 언덕에 다다라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내 몸을 의지할 십자가는 어디에 있나요?”라고 나섰다고 한다. 어린아이라서 죽음의 엄중함을 몰랐다고는 생각하고 싶지 않다.
믿음이 깊으면 죽음도 두렵지 않게 되는 것은 오로지 기독교적 신앙의 문제만은 아니다.
신라의 이차돈의 순교는 ‘삼국사기’, ‘삼국유사’, ‘해동고승전’ 등에 나타난다. ‘해동고승전’에 따르면 법흥왕이 불교를 국교로 삼고자 하나 신하들이 극렬히 반대한다. 이차돈은 왕에게, 자신을 죽이면 이적이 일어날 것이니 이로써 불교를 높이 세우시라, 간청한다. 이차돈이 왕의 명을 받들어 사찰을 세우고자 한다며 천경림(天鏡林)의 나무를 베어내자 귀족들이 이를 문제 삼고 나선다. 왕이 이차돈에게 참수형을 내리는데, 이차돈의 목에서 흰 피가 솟구치고 꽃비가 내리고 땅이 요동을 친다.
시간을 길게 생각하면 어느 스님의 석비에 남겨진 글귀처럼 삶은 부싯돌로 켜진 불꽃과도 같다. 그 찰나의 빛남에 지나지 않는다. 어느 땐가 사람은 죽을 수밖에 없다면, 어떻게 사느냐만큼이나 언제 어떻게 죽을 것이냐도 중대한 문제다.
신념을 버리고 올바름에서 멀어져 살아간들 무엇하랴. 그런 삶을 연장해 갈 뿐이라면 그 삶은 구차스러움을 면치 못할 것이다. 삶의 가치를 지탱해 주는 것은 자신이 믿는 바를 버리지 못함일 테다.
이 난세에, 니시자카의 언덕에서, 죽음 앞의 삶을 생각해 본다. 맑은 하늘에서 싸락눈이 내리고 바람이 불어 으스스 춥다.
/방민호 문학평론가·서울대 국문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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