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가 쓴 작품 표현 수준·인간 감각 흡사
인공지능의 표현물, 시인의 창작물 달라
황량한 대지에서도 시는 독자와 만날 것
인공지능의 쓰나미가 문학 작품, 마침내 서정시에도 덮쳐왔다. 최근 AI가 쓴 작품은 표현 수준이 상당할 뿐 아니라 인간의 감각과도 흡사하다. 리얼리즘과 모더니즘, 신춘문예 트렌드를 흉내 내며, 심지어 평론가의 취향까지 고려한 작시도 가능하다고 은근히 ‘과시’한다. 신춘문예 작품을 공모하는 신문사마다 ‘응모작에 생성형 AI 활용 사실이 확인될 경우 당선을 취소한다’라고 요강에 명시하고 있는 실정이다.
문학 작품은 시인이 쓰지만 독자가 읽어야 완성된다는 점에서, 주요 주체인 독자들이 AI의 작품을 시적이라고 여기고 감동한다면 이는 결코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이제 해묵은 질문을 다시 꺼낼 수밖에 없다. 시와 시인이란 무엇인가? 그리고 시적 언어란 무엇인가? 러시아 시학자 로만 야콥슨과 무카롭스키가 무려 90여 년 전에 던진 질문이었다.
우리의 관심사인 예술 작품의 기본적 가치는 ‘창의성’(Creativity)과 표현 의도 및 표현 간의 ‘진실성’(Authenticity)이다. 창의성은 기본적으로 복제물이 아니라는 뜻이다. 여기에는 이질적인 것을 결합하여 만드는 조합적 창의성도 있고 기존의 틀을 파괴하고 새로운 규칙을 만드는 변형적 창의성도 있다. 인공지능은 조합적 창의성이 가능하지만, 기존의 틀 자체를 파괴하는 근본적 변형은 어렵다. 또한 인간은 외부의 지시가 없어도 스스로 창작 동기를 발생시키지만, AI는 프롬프트의 지시가 있어야 글을 쓰기 시작한다. AI가 쓴 시가 창의적으로 보이는 이유는 매끄럽게 연결된 단어들 때문이다. 그리고 이전에 존재하지 않던 결과물을 내놓았다는 점에서는 창의성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생성물이 주체의 의식적 활동에 의한 것이 아니라는 점에서 온전한 창의성이라 부르기 어렵다.
진실성은 단순히 말과 현실의 정합성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표현 주체의 의도와 표현된 내용의 일치성을 따지는 일이다. 시인이 고통을 표현했다면 이는 그의 몸이 느낀 것이거나 이웃의 고통에 공감했기 때문이다. 김수영 시인은 시란 온몸으로 밀고 나가는 것이라고 했다. 글쓰기는 기교도 유희도, 여기(餘技)는 더더욱 아니며 내 몸의 모든 감각과 땀방울로 밀고 가는 노동이자 투쟁이라는 주장이었다. 니체는 ‘우상의 황혼’에서 오직 발로 걸어서 획득한 생각, 몸을 움직여 체화된 사유인 ‘에르강게넨 게당켄’(Ergangenen Gedanken)만이 가치가 있다고 했다. 그러나 AI의 진실성은 육체의 부재로 인해 검증할 수 없다.
구조주의 시학자 로만 야콥슨은 시의 본질을 언어의 자기 지시성(Self-referentiality)에서 찾았다. “나무를 보았다”라는 표현이 실재하는 나무만을 가리킨다면 비시적인 일상어이고, 나무의 상징과 비유를 생각하게 한다면 시적이라는 것이다. 시적 언어는 필연적으로 다의적이며 모호해진다. 야콥슨은 시를 ‘언어의 직조물’에 비유했다. 직조물은 기계가 더 정교하게 짤 수 있으므로 AI의 작품도 시적 형식을 지닐 수는 있다.
그러나 언어의 구조가 아닌 목소리를 가진 ‘자아’는 생성해낼 수 없다. AI의 시는 무수한 타자들의 언어 더미에서 골라낸 조합이기 때문이다. 결국 시의 진실성이란 ‘시인의 실존’에 기반하며 실존이란 감각을 지닌 몸이다. 시인이 쓴 작품에는 시인 자신의 삶이 걸려 있다. 반면 AI의 생성물은 통계적 우연의 조합이기에 작품에 대한 책임이 따르지 않는다. 책임이 없으니 권리도 없는 법이다.
시의 본질인 ‘진실성’은 언어와 문장 너머, 현실을 살아내는 시인의 존재 자체에 있다. 예술의 진실성은 구조나 핍진성이 아니라 결국 ‘창작자의 실존’에 달려 있다는 점에서 AI의 표현물과 시인의 창작물은 전혀 다른 것이다. AI의 시에 감동하는 것은 독자의 자유이나, 그 작품이 언어 더미 속에서 흡사한 단어를 골라 조합한 것임을 확인하는 순간 감동은 반감될 것이다. 인공지능의 쓰나미가 지나간 황량한 대지 위에서도, 시인의 시는 살아남아 독자와 만날 것이다.
/김창수 인하대 초빙교수·객원논설위원
경인일보 Copyright ⓒ kyeongin.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