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한동안 내가 어떤 삶을 살고 있는지 말하기가 쉽지 않았다. 무슨 일을 하느냐는 질문에 대답은 할 수 있었지만, 그 다음 말을 잇고 싶지는 않았다. 딱히 숨길 것도 없고 그렇다고 내세울 것도 없을 때 사람은 말수가 줄어든다. 설명을 덧붙일수록 오히려 더 초라해지는 기분이 들 때도 있었다. 그래서 나는 종종, 질문이 끝나기 전에 고개를 끄덕이는 쪽을 택했다.
그때의 나는 하루를 잘 산다는 감각이 없었다. 편의점 불을 켜고, 계산대를 닦고, 진열대를 채우고, 손님이 뜸해지는 시간을 기다렸다. 특별한 사건은 없었고 특별히 불행하다고 말할 이유도 없었다. 오히려 그 점이 더 힘들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하루가 반복될 때 사람은 자신이 멈춰 있는지, 아니면 아주 느리게라도 움직이고 있는지조차 알기 어렵다.
그 시절의 하루는 늘 비슷했지만, 감정은 매번 같지 않았다. 어떤 날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사실에 안도했고 어떤 날은 아무 일도 없다는 이유로 더 불안해졌다. 노력하고 있다는 감각이 들지 않을 때 사람은 쉽게 자신을 의심하게 된다. 나는 그 의심을 밀어내지도, 완전히 받아들이지도 못한 채 하루를 넘겼다.
그 시절의 나는 ‘노동’이라는 말을 깊이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 존엄이나 가치 같은 단어는 너무 멀게 느껴졌다. 노동은 그저 오늘을 넘기기 위한 조건이었고, 내일을 버틸 수 있는 최소한의 자격 같은 것이었다. 그때의 나는 결과를 말할 수 없는 사람이었다. 앞으로 무엇이 될 것인지, 언제쯤 이 시간이 끝날 것인지 설명할 수 없었다. 그래서 더 조심스러워졌고, 말 대신 행동을 택하게 됐다. 누군가의 삶을 쉽게 평가하지 않게 된 것도 그때부터였는지 모른다.
이상하게도 그렇게 바닥에 가까운 자리에서 보낸 시간은 나를 더 조급하게 만들지는 않았다. 오히려 그 반대였다. 말의 속도가 느려졌고 결정 앞에서 쉽게 결론을 내리지 않게 됐다. 예전 같았으면 단정했을 일들 앞에서, 한 번쯤 멈추게 됐다. 그 멈춤은 생각보다 많은 걸 바꿔 놓았다.
나는 그 시간을 ‘극복했다’고 말하지 않는다. 그건 너무 정리된 표현이다. 마치 모든 일이 계획대로 흘러온 것처럼 들리기 때문이다. 다만 분명한 건, 그 시간을 지나오며 말의 무게를 알게 됐다는 사실이다. 바닥에 오래 서 있어 본 사람은 위에 올라가서도 쉽게 말하지 않게 된다. 나는 그때 처음으로 말이 누군가의 하루를 다치게 할 수 있다는 걸 배웠다.
예전에 TV에서 유재석에게 후배 개그맨이 어떻게 성공할 수 있었는지 질문했을 때 유재석은 “나는 버틴 거다”라고 말했다. 난 늘 이 말을 곱씹으며 지냈던 것 같다. 지금 버티는 이 시간이 정말 의미가 있느냐는 질문이다. 나는 그 질문에 선뜻 답하지 않는다. 누구의 시간을 대신 평가해 줄 수는 없다. 다만 한 가지는 말할 수 있다. 인생에는 위로 올라가는 시간보다, 바닥에 머무는 시간이 더 길 수 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그 시간이 반드시 실패만은 아니라는 점이다.
우리는 너무 빨리 의미를 요구받는 시대를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 지금 하고 있는 일이 당장 어떤 결과로 이어지는지, 언제쯤 보상이 돌아오는지 끊임없이 증명해야 한다. 하지만 모든 시간은 그렇게 작동하지 않는다. 어떤 시간은 설명되지 않은 채 쌓이고, 나중에야 비로소 그 역할을 드러낸다. 바닥의 시간은 대부분 그런 식이다.
지금의 나는 여전히 고민 속에 있다. 책임을 피할 수 없는 자리에 있고 쉽게 결정해서는 안 되는 문제들을 매일 마주한다. 그래서 나는 그 시절을 잊지 않으려 한다. 계산대 앞에서 하루를 버티던 나를, 내일이 막막했던 나를 떠올린다. 그 기억이 나를 조심스럽게 만들고 사람 앞에서 함부로 말하지 않게 한다.
바닥의 노동은 나를 빠르게 성장시키지는 않았다. 대신 천천히 사람으로 만들었다. 누군가의 삶을 쉽게 재단하지 않게 했고, 결과보다 과정을 먼저 보게 했다. 지금도 어딘가에서 조용히 하루를 채우고 있을 누군가에게, 그 시간이 헛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가능성만은 남겨두고 싶다. 그 가능성 하나면 오늘을 넘기기에는 충분할지도 모른다.
/손율 경기대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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