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운동 철시투쟁 소년 참여

독립지사 임갑득 정체 확인

치과의사 임영균 동일 인물

문화·언론 활동 지역 영향

가족도 몰랐던 독립운동 이력

인천 독립운동사 재조명 기대

임갑득의 일제감시대상 인물 카드. 일본 경찰에 체포됐을 당시 나이는 15세였다. /국사편찬위원회 제공
임갑득의 일제감시대상 인물 카드. 일본 경찰에 체포됐을 당시 나이는 15세였다. /국사편찬위원회 제공

1919년 3·1 만세운동이 들불처럼 전국으로 번져 나가고 있을 때였다. 인천에서는 일제에 항의한다는 뜻으로 시내 상점의 문을 닫는 이른바 ‘철시(撤市) 투쟁’에 앞장섰던 18세 잡화상 김삼수(金三壽·1901~?)와 15세 객주집 사환 임갑득(林甲得·1904~?)이 있었다.

철시라는 항일 시위로 일본 경찰에 붙잡힌 두 소년은 재판을 거쳐 서대문감옥에서 수개월간 옥고를 치렀다. 다른 도시보다 일본인이 유독 많이 거주했던 인천에서 누구보다 용감하게 저항했던 두 소년의 출소 이후 행적은 후일담이나 남은 자료가 발굴되지 않아 알 길이 막막했다.

이들 가운데 임갑득 지사. 그의 정체가 인천 지역사 연구를 이어오고 있는 이들이 머리를 맞댄 끝에 밝혀졌다. 멀리 있지 않았다. 인천에서 처음으로 치과의원을 낸 치과의사이자 문화예술인, 언론인으로서도 지역사에 중요한 발자취를 남긴 임영균(林榮均·1904~1966) 선생이 바로 임갑득 지사였다는 사실이 확인됐다. 인천의 독립운동사와 지역사가 또 한 번 확장되는 순간이다.

■ 임영균은 임갑득이었다

지난달 27일 오후 인천 동구 배다리 아벨서점 전시관에서 임영균 선생의 손자 임상호(68) 씨를 만났다. ‘고유섭 평전’(한길사·2024)에서 우현 고유섭(1905~1944)의 친우로서 임영균을 다룬 바 있는 이원규 작가와 동행했다.

임영균과 임갑득을 연결짓게 된 발단은 아벨서점 곽현숙 대표가 인천 동구 영화학교(1892년 개교·현 영화초등학교) 학적부에 ‘임갑득’(1915년 입학)이란 이름이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면서부터다. 현재 아벨서점 전시관에서는 임영균과 그의 아들인 외교관 출신 임명진(1928~2024) 화백 관련 전시를 개최하고 있다. 그런데 영화학교 학적부 속 임갑득의 내용에 그와 같은 해 태어난 임영균과 관련된 정보가 겹쳐 있다는 게 곽 대표의 설명이다.

이날 아벨서점에서 임상호 씨, 임영균의 행적을 연구한 이원규 작가, 곽현숙 대표 등의 만남이 성사된 이유다. 직계 비속인 임상호 씨가 지자체에서 발급받은 제적 등본을 보면, 임영균은 1918년 5월 큰아버지 임영환에게 입양돼 양자로 입적했다. 1926년 4월 ‘갑득’에서 ‘영균’으로 개명했다.

아벨서점 전시관에서 진행 중인 임명진 전 대사 미술전 모습. 2026.1.27 /박경호기자 pkhh@kyeongin.com
아벨서점 전시관에서 진행 중인 임명진 전 대사 미술전 모습. 2026.1.27 /박경호기자 pkhh@kyeongin.com

그렇다면 임영균의 이전 이름인 임갑득이 역사에 기록된 독립지사 임갑득과 동일 인물일까. 우선 영화학교 학적부 속 임갑득의 생년월일과 철시 투쟁으로 재판을 받은 임갑득의 판결문(1919년) 속 생년월일이 같다. 판결문상 임갑득의 주소가 임영균의 친부 임용환의 주소와 같다. 제적 등본에 개명 사실까지 기록돼 있으니, 임영균과 임갑득은 동일인이라고 봐야 한다.

그동안 두 인물이 서로 연결된 적은 없었다. 임상호 씨조차 “제적 등본을 확인하기 전까지 할아버지의 개명 전 이름은 알지 못했고, 독립운동을 했다는 내막도 자세히 듣지 못했다”며 “후사가 없었던 장손 집안 호적에 이름만 올렸다고 들었다”고 말했다.

이와 관련해서는 애초 경인일보 ‘인천인물 100인’ 시리즈의 ‘인천 최초 치과개원 임영균’편(2007년 7월25일자 9면 보도)에서 “임영균의 어린 시절 이름은 갑득이었다고 한다”는 가족의 구술이 나온 바 있다.

그러나 독립지사 임갑득이 재조명된 시기는 2018년 김락기(현 한국근대문학관장) 인천문화재단 인천역사문화센터장이 ‘일제감시대상 인물카드’ 중 인천 지역 인물들을 조사·연구하면서부터다. ‘10년 넘는 시간의 공백’ 탓에 그동안 어떠한 연구자도 임영균과 임갑득을 연결짓지 못했다. 더군다나 ‘객주집 사환’이라는 직업으로 판결문에 적시된 10대 소년이 훗날 인천의 대표적 고학력 엘리트로 성장할 줄은 어느 누구도 상상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임갑득은 그렇게 한동안 잊혔다.

■ 임갑득·임영균은 누구인가

1919년 3월27일부터 인천 시내 상점 상당수가 철시에 동참한 가운데 김삼수와 임영균의 옛 이름 임갑득은 4월1일 오전 11시께 우각리 등지의 아직 폐점하지 않은 점포 17곳에 문을 닫으라는 경고문을 배포했다. 일부 점포가 영업을 계속하자 이튿날 김삼수와 임갑득은 재차 철시하라고 경고했으며, 4월3일 “속히 폐점하지 않으면 최후의 수단을 취할 것”이라고 쓴 최후통첩문을 내리에 있는 상점에 투입하려다 경찰에 체포됐다.

김삼수와 임갑득은 보안법 위반과 강요미수 혐의로 기소돼 1심에서 각각 징역 10개월을 선고받았고, 당시 15세에 불과했던 임갑득은 항소심에서 징역 6개월로 감형됐다. 당당하게 재판에 임했다. 임갑득은 상고심에서 항소 이유에 대해 “조선민족으로서 정의·인도에 기초하는 의사발동이며 범죄가 아니다”라고 했다.

김삼수와 임갑득의 상고심 판결문 원본 첫 장. /국사편찬위원회 제공
김삼수와 임갑득의 상고심 판결문 원본 첫 장. /국사편찬위원회 제공

임영균은 자신이 발행인으로 1950년대에 창간했던 신문 ‘주간인천’ 제24호(1954년 9월27일자·아벨서점 전시 자료)에 직접 쓴 ‘나의 경인통학기’에서 영화학교를 졸업한 후 “서울 k중학에 입학해서 통학생활”을 했으나, 반년 만에 안질환으로 학업을 중단했다고 회고했다. 철시 투쟁은 학교를 쉬면서 완쾌될 때쯤이었다고 했다. 당시 임갑득이란 이름으로 객주집에서 일하던 중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임영균은 출소 후 YMCA 중학부를 거쳐 1922년 경성치과전문학교에 입학해 1926년 졸업했다. 그는 일제강점기 인천 지역 엘리트의 산실이었던 ‘경인기차통학생친목회’의 문예부 소속으로 고유섭(훗날 한국 최초의 미술사가), 진종혁(1904~1969·훗날 극작가 진우촌), 조진만(1903~1979·훗날 대법원장) 등 쟁쟁한 인물들과 교유했다.

1927년 인천 최초의 치과의원 ‘임치과’를 개원했으며 진우촌, 고일(1903~1975) 등 지식인들과 함께 연극단체 ‘칠면구락부’를 결성해 문화운동에도 힘썼다. 또 ‘주간인천’ ‘경기매일신문’ 등 주요 지역언론 창간·경영에 참여한 언론인이면서 ‘인천양조장’(현 문화공간 스페이스빔 건물)을 경영한 기업인이었다. 경기도 치과협회 회장, 인천 로타리클럽 회장 등을 지내기도 했다.

임영균 선생. /경인일보DB
임영균 선생. /경인일보DB

■ 더 많은 이야기가 이어진다

임영균은 지역에서의 굵직한 행적만큼이나 그와 얽힌 이야기가 많다. ‘인고인물사’(인천고총동문회·2018)를 보면, 임영균의 동생 임근수(1916~1979) 전 서울대 신문학과 교수는 1948년 ‘코리아타임스’ 기자 출신의 언론학계 선구자다. 임근수는 1942년 인천 덕적도의 방언과 어부가 등을 기록한 덕적도 최초의 문화보고서를 월간지 ‘조광’에 투고하기도 했다. 당시 덕적도의 민요·풍속·언어 등을 기록해 가치가 큰 자료로 남아있다.

아들 임명진 전 대사는 1948년 외무부(외교부)에서 공직생활을 시작해 주 덴마크대사, 주 베네수엘라대사 등을 지냈고, 1961년 조선일보가 주최한 ‘제5회 현대미술작가 공모전’에 입선해 오랫동안 화가로도 활동했다. 그의 집안은 수년 전까지도 인천양조장 옆 한옥에서 거주했다.

김삼수·임갑득의 철시 투쟁은 ‘독립운동사 편찬위원회’가 1971년 펴낸 ‘독립운동사’(제2권)에 기록될 정도로 인천의 대표적 독립운동으로 꼽힌다. 임갑득과 임영균을 연결하기 위해 각종 자료를 찾아내고 연구한 이원규 작가는 “과거 인물의 자취는 도시의 소중한 기억자산”이라며 “임갑득 지사는 인천 3·1운동 5인 중 한 명, 그러나 잃었던 인물”이라고 말했다. 이어 이 작가는 “임 지사가 임영균 선생이었다는 발견은 인천인들에게 뿌듯한 긍지를 안겨준다”며 “도시의 정체성은 물질과 재화가 아니라 이런 인물과 역사 자산으로 이뤄진다”고 했다.

가족들과 함께한 임영균 선생(앞줄 가운데). /경인일보DB
가족들과 함께한 임영균 선생(앞줄 가운데). /경인일보DB

그런데 생전 임영균은 왜 독립운동에 참여했던 일을 가족에게조차 자세히 언급하지 않았을까. 임영균과 ‘경인기차통학생’으로 만났으며, 한국 여성운동단체의 시초 격인 ‘근우회’ 인천지회에서 활동했던 지식인이었던 부인 고(故) 최정순 여사, 임명진 전 대사와 인연이 깊은 곽현숙 대표는 “평생을 청춘으로 오늘만 사는 스타일이었던 분이라 지나간 이야기는 잘 하지 않으셨던 것 같다”고 말했다. 임상호 씨는 “할아버지가 식민지 시대가 계속될 것 같으니 ‘이까짓 족보가 무슨 소용이냐’며 족보도 불태우는 등 자신이 얘기를 꺼렸다는 말을 집안 어른들에게 들은 적이 있다”며 “성품상 (독립운동을) 자랑처럼 이야기하지 않을 분이셨다”고 했다.

이원규 작가는 “그동안 인천 지역사를 연구했던 1세대 향토사학자들도, 나 같은 2세대 연구자들도 미처 파악하지 못했다”며 “임영균은 독립유공자로 추서돼야 하고, 인천시 ‘인천시사’나 내가 쓴 ‘고유섭 평전’은 물론 각종 국가 기록들을 수정해야 한다”고 말했다.

임영균 선생 관련 자료와 임명진 전 대사의 작품은 내달 30일까지 아벨서점 전시관에서 만날 수 있다.

임영균 선생이 1950년대 발행한 지역신문 ‘주간인천’. 아벨서점 전시관에 전시된 모습. 2026.1.27 /박경호기자 pkhh@kyeongin.com
임영균 선생이 1950년대 발행한 지역신문 ‘주간인천’. 아벨서점 전시관에 전시된 모습. 2026.1.27 /박경호기자 pkhh@kyeongi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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