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인일보, 자료 검토 결과 밝혀
1919년 3·1운동 당시 인천 도심에서 항일 시위 차원으로 상점 문을 닫은 이른바 ‘철시(撤市) 투쟁’에 앞장섰으나, 이후 행적이 묘연했던 소년 독립지사 임갑득이 인천 최초의 치과의사 임영균(1904~1966)이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경인일보는 최근 임영균의 후손으로부터 확보한 제적 등본, 최근 발굴된 임갑득의 인천 영화학교 학적부 내용 등 각종 자료를 검토한 결과, 근현대 시기 인천에서 활발하게 활동한 지식인 임영균과 독립지사 임갑득이 동일인임을 확인했다.
10대 소년 임갑득과 김삼수(1901~?)가 주도한 철시 투쟁은 일본인 인구가 많아 3·1운동 때 만세 시위가 쉽지 않았던 인천 도심에서 몇 안 되는 독립운동 사건으로 꼽힌다. 이 사건으로 옥고를 치른 임갑득은 자취를 감췄다.
임영균은 경성치과전문학교를 나와 1927년 인천 최초 치과의원을 개원했다. 문화예술인, 언론인 등 다양한 영역에서 활동한 인천 오피니언 리더였다. 임영균이 어릴 적 친척에게 입양되고, 개명하는 과정에서 ‘임갑득’과의 역사적 연결고리가 끊겼던 것이다.
임갑득의 판결문에는 ‘객줏집 사환’으로 직업이 명시돼 있다. 그가 훗날 지역에서 손꼽히는 고학력 엘리트가 됐으리라고 상상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인천 지역사에서 이름이 뚜렷한 두 인물이 하나로 합쳐졌을 때 새로운 이야기가 시작된다.
/박경호기자 pkhh@kyeongi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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