꼬리에 꼬리 물듯 하나로 물든 흑백 향연

작품 20여점 ‘생과 사’·‘꿈과 현실’ 등 두 대척점의 경계 드러내

동 떨어진 것이 아닌 서로 맞닿은 흐름 표현… 내년 3월1일까지

유승호 작가의 ‘세월아 돌려다오’. 2026.2.12 /이시은기자see@kyeongin.com
유승호 작가의 ‘세월아 돌려다오’. 2026.2.12 /이시은기자see@kyeongin.com

나이 많은 한 남성이 나무에 걸터앉아있다. 먼산을 바라보며 깊은 생각에 잠긴 듯 보인다. 전통 산수의 고즈넉함이 느껴지는 유승호 작가의 작품 ‘세월아 돌려다오’다.

이 작품은 조금 더 가까이서 들여다보면 색다른 재미를 느낄 수 있다. ‘둥’, ‘슈우’, ‘우수수수’처럼 익숙한 의성어와 의태어가 깨알 같은 크기로 콕콕 박혀있고, 글자가 모여 하나의 커다란 형상을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꼬리에 꼬리를 물듯 연결된 글자 속에서 반가운 문자를 찾다보면 어느새 작품에 더 깊이 몰입하게 된다.

문자들이 서로 충돌하며 고정관념을 해체시키는 ‘세월아 돌려다오’는 수원시립미술관 올해 첫 기획전 ‘블랑 블랙 파노라마’에서 관객들을 만나고 있다. 전시는 흑과 백색을 가진 20여점을 파노라마처럼 펼쳐보이고 있다.

수원시립미술관 올해 첫 기획전 ‘블랑 블랙 파노라마’ 내부 전경. /수원시립미술관 제공
수원시립미술관 올해 첫 기획전 ‘블랑 블랙 파노라마’ 내부 전경. /수원시립미술관 제공

작품들은 생과 사, 가짜와 진짜, 꿈과 현실 등 대척점에 있는 듯한 두 가치의 ‘경계’를 드러내고 있다. 김두진 작가의 ‘대지-엄마의 땅’은 인간이 바라는 자연의 풍요로움과 눈앞에 실존하는 자연의 간극을 형상화했다. 작가는 작품을 통해 삶과 죽음이 동떨어진 것이 아니라 서로가 맞닿아있는 연속된 흐름이라는 점을 나타낸다.

이배 作 ‘불로부터’. /수원시립미술관 제공
이배 作 ‘불로부터’. /수원시립미술관 제공

이배 작가의 ‘불로부터’는 캔버스에 숯을 사용해 불과 시간, 연소와 소멸의 흔적을 화면에 남겼다.

이수경 작가의 ‘번역된 도자기_2019 TVW5’는 도자를 만드는 과정에서 발생한 균열과 파편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보이면서 서로 다른 조각과 결합시켰다. 두 작가 모두 작업 과정을 숨기지 않고 그 자체로 하나의 새로운 결과물을 만들어낸 것이다.

이수경 作 ‘번역된 도자기’. /수원시립미술관 제공
이수경 作 ‘번역된 도자기’. /수원시립미술관 제공

인쇄 매체 위에 긋고 덧그리는 행위를 반복한 최병소 작가의 ‘무제-0160924’와 플렉시 글라스와 LED를 활용해 빛의 밀도를 조절하며, 관람자의 시선에 따라 자연 풍경이 응집되거나 분해되는 최수환 작가의 ‘빔-바다’ 등도 전시돼있다.

조은 학예연구사는 “관객들이 작품에서 형상화하는 대상 그 자체보다는, 메시지를 어떤 방식으로 풀어가려했는지 주목할 수 있었으면 한다”며 “전시실 동선을 따라가다보면 구상에서 추상적인 작품으로 이어지는데, 작품을 오래도록 감상할수록 그 구조가 더욱 또렷하게 느껴질 것”이라고 말했다. 전시는 내년 3월1일까지다.

/이시은기자 see@kyeongi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