꼬리에 꼬리 물듯 하나로 물든 흑백 향연
작품 20여점 ‘생과 사’·‘꿈과 현실’ 등 두 대척점의 경계 드러내
동 떨어진 것이 아닌 서로 맞닿은 흐름 표현… 내년 3월1일까지
나이 많은 한 남성이 나무에 걸터앉아있다. 먼산을 바라보며 깊은 생각에 잠긴 듯 보인다. 전통 산수의 고즈넉함이 느껴지는 유승호 작가의 작품 ‘세월아 돌려다오’다.
이 작품은 조금 더 가까이서 들여다보면 색다른 재미를 느낄 수 있다. ‘둥’, ‘슈우’, ‘우수수수’처럼 익숙한 의성어와 의태어가 깨알 같은 크기로 콕콕 박혀있고, 글자가 모여 하나의 커다란 형상을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꼬리에 꼬리를 물듯 연결된 글자 속에서 반가운 문자를 찾다보면 어느새 작품에 더 깊이 몰입하게 된다.
문자들이 서로 충돌하며 고정관념을 해체시키는 ‘세월아 돌려다오’는 수원시립미술관 올해 첫 기획전 ‘블랑 블랙 파노라마’에서 관객들을 만나고 있다. 전시는 흑과 백색을 가진 20여점을 파노라마처럼 펼쳐보이고 있다.
작품들은 생과 사, 가짜와 진짜, 꿈과 현실 등 대척점에 있는 듯한 두 가치의 ‘경계’를 드러내고 있다. 김두진 작가의 ‘대지-엄마의 땅’은 인간이 바라는 자연의 풍요로움과 눈앞에 실존하는 자연의 간극을 형상화했다. 작가는 작품을 통해 삶과 죽음이 동떨어진 것이 아니라 서로가 맞닿아있는 연속된 흐름이라는 점을 나타낸다.
이배 작가의 ‘불로부터’는 캔버스에 숯을 사용해 불과 시간, 연소와 소멸의 흔적을 화면에 남겼다.
이수경 작가의 ‘번역된 도자기_2019 TVW5’는 도자를 만드는 과정에서 발생한 균열과 파편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보이면서 서로 다른 조각과 결합시켰다. 두 작가 모두 작업 과정을 숨기지 않고 그 자체로 하나의 새로운 결과물을 만들어낸 것이다.
인쇄 매체 위에 긋고 덧그리는 행위를 반복한 최병소 작가의 ‘무제-0160924’와 플렉시 글라스와 LED를 활용해 빛의 밀도를 조절하며, 관람자의 시선에 따라 자연 풍경이 응집되거나 분해되는 최수환 작가의 ‘빔-바다’ 등도 전시돼있다.
조은 학예연구사는 “관객들이 작품에서 형상화하는 대상 그 자체보다는, 메시지를 어떤 방식으로 풀어가려했는지 주목할 수 있었으면 한다”며 “전시실 동선을 따라가다보면 구상에서 추상적인 작품으로 이어지는데, 작품을 오래도록 감상할수록 그 구조가 더욱 또렷하게 느껴질 것”이라고 말했다. 전시는 내년 3월1일까지다.
/이시은기자 see@kyeongi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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