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 과잉시대, 사촌 아닌 가해자 돼

양해 전화·말 한마디로 갈등 예방

모든 일상 정답지 아닌 최후 보루

서로가 처지 살피는 공동체 되길

이재홍 변호사·수원경실련 집행위원
이재홍 변호사·수원경실련 집행위원

변호사는 타인의 불행을 먹고 산다. 다소 서글픈 자조 섞인 농담이지만, 타인의 갈등이 깊어질수록 일감이 늘어나는 직업적 구조를 생각하면 부정하기 어려운 사실이다. 누군가의 눈물과 분노가 서린 서류 뭉치가 곧 나의 생업이 된다는 역설은 늘 마음 한구석을 무겁게 짓누른다. 그래서인지 일상에서도 모든 상황을 잠재적 분쟁의 시나리오로 가정하는 직업병이 있다. 최근 이사를 하면서도 이러한 태도는 여실히 드러났다. 설레는 새출발의 공간이어야 할 집이 필자에게는 전장처럼 느껴졌고, 계약서 속 잠재적 적으로부터 스스로 보호하려고 온 신경을 곤두세웠다.

그러나 이삿짐 정리를 대강 마치고 복도에서 이웃들을 마주한 순간, 머릿속을 채웠던 복잡한 법리는 한순간에 무력해졌다. 사람과 사람이 맺는 관계만큼은 법만으로 해결되지 않는다는 단순하고도 명징한 진리를 다시금 깨달은 것이다. 층간소음을 견디게 하는 완충 지대나 주차 공간의 비좁음을 상쇄하는 묵시적 합의 같은 것들은 결국 차가운 ‘법’의 잣대가 아닌, 뜨거운 ‘사람’의 마음이 머무는 영역에 놓여 있었다. 엘리베이터에서 나눈 짧은 눈인사 한 번이 수십 페이지의 표준임대차계약서보다 더 강력한 평화 유지 장치였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흔히 현대 사회를 ‘법의 과잉 시대’라고 부른다. 층간소음이 발생하면 분쟁조정위원회를 먼저 떠올리고, 주차 문제로 시비가 붙으면 재물손괴나 업무방해를 운운하며 심심치 않게 공권력을 호출한다. 물론 법은 갈등을 해결하는 최후의 명확한 기준을 제시한다. 하지만 법의 잣대를 들이대는 순간, 벽을 맞대고 살던 이웃은 ‘사촌’이 아닌 ‘가해자’나 ‘피고’가 된다. 판결문이 법적 승패를 나눠줄 수는 있어도, 그 집 문을 열고 나올 때 마주치는 차가운 공기와 서먹한 시선까지 해결하지는 못한다.

법은 도덕의 최소한이라는 고전적인 명제가 있다. 이 말은 역설적으로 우리 삶의 대부분이 법이 아닌 도덕과 예의, 배려로 채워져야 함을 의미한다. 공동체의 평화는 우편으로 전달되는 내용증명이 아닌, 복도에서 이루어지는 가벼운 목인사에서 시작되는 것이다. 주차 공간이 부족할 때 미리 양해를 구하는 짧은 전화 한 통, 위층의 소음에 날 선 항의 대신 건네는 따뜻한 한마디 같은 ‘비법률적 행위’가 수천만 원짜리 민사소송보다 훨씬 강력한 갈등 예방책이다. 지금 우리 사회에 필요한 것은 더 촘촘한 법령이나 가혹한 처벌이 아니라 무너진 공동체 의식의 복원이다. 지자체 역시 규제 위주의 행정보다는 주민들이 자율적으로 갈등을 조정하고 대화할 수 있는 ‘마을 공동체’ 기능을 강화하는 데 더 많은 공을 들여야 한다.

지역사회에 터를 잡고 개업 변호사로서 발로 뛰며 느낀 점은, 법률 지식이 갈등의 증폭제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이다. 오히려 그 지식은 이웃 간의 갈등을 법정으로 끌고 가기보다, 법정에 가기 전에 대화로 풀 수 있도록 돕는 ‘중재의 도구’가 되어야 한다. 갈등의 골이 깊어질 대로 깊어진 뒤에야 찾아오는 의뢰인들을 보며 늘 안타까움을 느낀다. 조금만 더 일찍, 서로를 법적 대결 상대가 아닌 함께 살아가는 동료 시민으로 바라보았더라면 피할 수 있었던 비극들이 너무나 많기 때문이다. 분쟁을 예방하고 원만하게 중재하는 것이야말로 전문직이 지녀야 할 진정한 사회적 책임이라 믿는다.

이제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져본다. 법으로 싸우는 사람인가, 아니면 법으로 평화를 만드는 사람인가. 필자는 늘 지인들에게 ‘날 찾지 않는 인생이 좋은 인생이다’라고 항변한다. 법은 갈등 해결의 최후 보루여야지 모든 일상의 정답지가 되어서는 안 된다. 우리 사회가 ‘법대로’를 외치는 삭막한 소송의 장이 아니라, 서로의 처지를 먼저 살피는 온기 있는 공동체가 되길 소망한다. 내일 아침, 옆집 이웃에게 건네는 짧은 인사가 우리 동네를 지키는 그 어떤 강력한 법보다 낫다는 사실을 기억했으면 한다. 타인의 불행을 정리하는 일보다, 그 불행이 시작되지 않도록 돕는 일이 법조인으로서 훨씬 가치 있는 업(業)이라 믿기 때문이다.

/이재홍 변호사·수원경실련 집행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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