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바랜 책들 사이로 여유가 찾아왔다
나는 읽기 쉬운 마음이야 당신도 쓱 훑고 가셔요 - 잔나비, ‘주저하는 연인들을 위해’ 가사 中 -
대형 서점에서 빳빳한 새 책을 집을 때면 반드시 사야 할 것 같지만, 이미 손때가 묻은 중고서적은 서가에서 부담 없이 꺼내 읽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편해진다. 헌책방에서 사람의 손길을 기다리는 책의 심정이 투영된 듯한 가사를 흥얼거리다 보면 자연스레 오래된 서점이 떠오른다.
2019년 3월 발매된 잔나비 정규 2집 타이틀곡 ‘주저하는 연인들을 위해’는 탄탄한 마니아층을 거느렸던 인디밴드 잔나비를 모든 세대가 좋아하는 대중 아티스트로 끌어올린 ‘메가 히트곡’이 됐다. 이 노래의 뮤직비디오는 인천 동구의 배다리 헌책방 골목을 배경으로 제작됐다. 드라마 ‘도깨비’, 영화 ‘극한직업’ 등 상업적으로 성공한 작품을 여럿 배출해낸 이 거리의 풍경을 꾸밈없이 가장 잘 담아낸 작품을 꼽는다면 ‘주저 않고’ 이 뮤직비디오를 생각하게 된다.
1980년대 풍경을 그린 뮤직비디오에서 남주인공과 여주인공은 세 번 마주친다. 집배원인 여주인공이 남주인공의 집에 소포를 전달하면서 처음 마주친 두 사람이 다시 만난 장소는 헌책방 골목의 ‘대창서림’(극중에서는 ‘내창서림’이라는 간판으로 각색)이다. ‘책’이라는 공통 관심사가 생긴 두 사람은 동인천역과 도원역 사이 철길 옆을 따라 걸으면서 대화를 나눈다. 그날부터 남주인공은 눈에 담아둔 그녀의 얼굴을 연필로 그려내지만, 애꿎은 종이만 수없이 구겨지고 만다.
두 사람이 마지막으로 마주치는 장소는 배다리 철길 위를 지나는 육교다. 여주인공 옆에는 다른 남자가 서 있다. 남주인공은 가벼운 인사만 건네고 도망치듯 걸음을 재촉한다. 그녀에게 품은 마음을 내려놓은 순간 남주인공은 여주인공의 초상화를 완성한다.
시간이 지나고 여주인공이 대창서림 앞에 놓인 우체통에서 소포물을 꺼내다 책 한 권을 발견한다. 남주인공과 철길 옆을 걸으며 이야기했던 그 책이다. 책장을 넘겨 보니 연필로 그린 한 여성의 초상화가 책갈피처럼 끼워진 걸 발견하며 영상은 마무리된다.
힘든 시절 저렴하게 책 구할 수 있던 장소
학교 마친 학생들에겐 놀이터이자 도서관
일제 패망으로 급히 인천을 떠난 일본인들
소유하던 서적들 노점서 판매하며 활성화
90년대 상권 옮겨가 골목도 자연스레 침체
최근엔 영화·드라마 찍고 관광 명소 부상
대창서림에서 만난 추억과 경험
뮤직비디오 내용처럼 배다리의 헌책방은 누군가에게 마음을 전하거나 혹은 정을 나누는 일종의 플랫폼 역할을 해왔다. 책을 사고파는 방식은 인터넷의 보급과 함께 더 활발해졌지만, 헌책방 골목이 간직하고 있는 수많은 사람의 기억까지 전해주진 못한다. 참고서 하나 구하기 어려웠던 시절 저렴한 가격에 책을 구할 수 있었던 헌책방은 대형 프랜차이즈 서점 부럽지 않은 장소였다. 굳이 책을 사지 않고 열심히 읽기만 해도 뭐라 하는 이 하나 없었다.
지난 3일 오후 뮤직비디오의 배경이 된 대창서림에 들어서니 헌책 특유의 내음이 느껴졌다. 대형 서점에 갈 때는 사야 할 책을 정해두고 가거나 베스트셀러 목록이나 신간 목록에 비치된 서적을 주로 읽게 되지만, 헌책방은 마음 닿는 대로 책을 꺼내 읽게 되는 매력이 있다.
서가에 꽂혀 있던 님 웨일즈의 ‘아리랑’ 한 권을 집어 들었다. 한때 금서(禁書)로 지정돼 몰래 봐야 했던 이 책은 2000년대엔 수능 대비 필독도서로 고등학생들에게 많이 읽혔다. 책을 펼치면 그 시절의 기억도 함께 따라온다. 읽기 싫었던 책을 억지로 읽고 독후감을 쓴 뒤 부모님 몰래 팔았던 기억이 있는데, 어쩌면 그 책이 돌고 돌아 여기까지 왔을지도 모를 일이다. 철없던 행동이 떠올라 약간의 민망함과 함께 그 시절의 추억을 돌아보게 된다.
다른 책을 훑어보다가 연두색 색연필로 밑줄이 그어진 한 페이지에서 시선이 멈췄다. 아마 이 책의 원래 주인이 인상 깊게 읽은 내용이라 표시해 둔 모양이다. 온라인 중고서점에서는 필기가 돼 있거나 밑줄이 그려진 책의 판매가 제한된다고 안내하지만, 헌책방은 그런 제약을 두지 않는다.
그렇다고 책의 상태가 나쁘지도 않다. 출간된 지 다소 오래돼서 종이의 빛이 약간 바랬어도 구겨짐 없이 멀끔하다. 이 책을 거쳐 간 사람들이 책을 어떻게 다뤘는지, 어떤 생각을 하면서 읽었는지 유추해볼 수 있다는 점이 헌책방의 가장 큰 매력이다.
80년 세월 간직한 헌책방 골목
1883년 개항 이후 개항장에 조계지가 만들어지면서 일본인들에 의해 밀려난 조선인들은 배다리에 새로운 터를 잡는다. 사람과 물자가 들어오는 항구도시 인천에 일자리를 찾으러 온 이들이 모여 살기 시작했다. 개항장에서 수도 서울로 이동하는 길목에 위치한 지리적 특성상 사람은 물론 물자의 이동도 활발했다. 상권이 형성되기에 최적의 조건을 갖춘 셈이었다.
일제시대 신포동에 공설 어시장과 청과물 시장 등이 만들어졌지만, 조선인들은 ‘배다리시장’에서 물건을 사고팔았다. 당시 시장은 5일에 한 번 문을 여는 ‘5일장’이 대다수였지만, 100여년 전 배다리는 지금으로 치면 매일 물건을 파는 상설시장의 모습을 갖췄다.
배다리시장에서 ‘헌책’을 취급하기 시작한 시기는 광복 직후부터다. 일제 패망으로 일본인들이 급히 인천을 떠나면서, 이들이 소유하고 있던 서적이 노점에서 판매되기 시작했다. 한국전쟁 이후인 1955년 지금의 송림오거리 방향으로 도로가 개통되고 소비 수요가 중앙시장으로 이동하면서 배다리시장은 쇠락했는데, 시장 대신 헌책방 골목이 본격적으로 활성화된 시점이 이때다. 좌판에서 헌책을 팔던 상인들이 배다리시장의 점포로 자리를 옮기면서 지금의 모습이 형성됐다.
지금도 배다리 일대에는 창영초등학교, 영화초등학교, 송림초등학교 등 인천에서 100년 안팎의 역사를 자랑하는 학교들이 자리하고 있다. 당시에도 학교를 마치고 나온 학생들에게 헌책방은 놀이터이자 도서관 같은 역할을 했다. 책을 대량으로 찍어낼 기술이 발달하지 않았던 터라 헌책이 귀하던 시절, 싼값에 책을 구하기에 배다리 헌책방 골목만 한 곳은 없었다.
개학 무렵에는 교과서나 참고서를 저렴하게 사기 위해 부모님 손을 잡고 온 학생들로 인산인해를 이뤘다. 학용품이나 옷, 신발, 먹거리 등을 파는 노점상들까지 자리를 잡은 배다리 헌책방 골목은 제2의 전성기를 맞이했다. 헌책방 골목에 필기구나 각종 학용품을 파는 문구점이 지금도 남아있는 이유다.
헌책방 골목이 침체의 길을 걷게 된 건 1990년대 후반부터다. 인천 중심 상권이 동인천역 일대에서 구월동으로 옮겨갔고, 대형 프랜차이즈 서점들이 들어서면서 책을 쉽게 구할 수 있게 된 구조적 변화도 한몫했다. 조금 더 시간이 흘러 영상 콘텐츠가 텍스트 기반의 매체를 밀어내면서 책의 영향력이 예전만 못한 것도 사실이다. 한때 학생들이 메는 가방을 흔히들 ‘책가방’이라고 표현하던 시절이 있었지만, 노트북과 스마트폰이 등장한 지금은 책가방이라는 단어가 어색하게 느껴지는 시대가 됐다.
모두에게 열려 있는 ‘기억 창고’
배다리 헌책방 골목은 역설적이게도 영상 콘텐츠와 결합해 다시금 사람들의 주목을 받았다. 천만 관객을 동원한 영화, 화제의 드라마가 이곳에서 촬영되면서 관광 명소로 급부상했다. 다만 헌책방 골목 또는 배다리를 소재로 한 작품들이 아니라는 점은 애석하게 느껴진다. 100년 전부터 인천 사람들의 추억이 서린 이 지역의 이야기를 어떻게 보존해 나갈지 고민이 필요한 시점이다.
대창서림을 운영하는 장덕윤씨는 배다리 헌책방 골목이 지역유산으로서 사람들의 일상에 남았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말했다.
장씨는 “그동안 문화유산을 보존하는 방식은 재개발이나 재건축을 통해 기존의 것을 헐고, 박물관 등에 기록과 유물을 전시하는 형태가 대부분”이라면서 “원형이 그대로 남아 일상에서 경험할 수 있을 때 사람들의 추억도 그대로 간직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고 했다. 이어 “배다리 헌책방 골목도 지금처럼 사람들의 일상에서 추억을 쌓을 수 있는 방식으로 지역을 대표하는 유산이 되길 바란다”고 했다.
무언가를 경험하거나 추억하기에 책만큼 좋은 매개체는 없다. 처음 책을 읽었을 때는 그 내용에만 집중하지만, 시간이 흐르고 같은 책을 다시 찾게 되면 그 시절의 자신과 당시의 사람들, 풍경과 감정도 마주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배다리 헌책방 골목은 누구에게나 열려 있는 소중한 기억 창고다. 유년시절 헌책방 골목의 추억이 있는 이들은 물론 난생 처음 이곳을 찾은 사람들도 헌책방 한편에 잠든 자신만의 이야기를 꺼내볼 수 있어서다. 볕이 따스해지는 봄의 초입, 배다리 헌책방 골목에서 느린 걸음으로 저마다의 기억을 다시 만나보길 권한다.
/한달수기자 dal@kyeongi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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