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골군 침공후 ‘오읍의 눈물’ 마르지 않았다

 

바닥까지 투명 ‘동네의 상징물’

내성 축조때 ‘벼락’… 일꾼 해갈

이규보 ‘꿀맛’ 등 이야기 샘솟아

송악산 북쪽 진송루 아래에 있는 오읍약수 터. 고려 때 내성을 쌓을 때 벼락이 바위에 내리치면서 만들어졌다는 얘기가 전한다. 2026.3.23 /정진오기자 schild@kyeongin.com
송악산 북쪽 진송루 아래에 있는 오읍약수 터. 고려 때 내성을 쌓을 때 벼락이 바위에 내리치면서 만들어졌다는 얘기가 전한다. 2026.3.23 /정진오기자 schild@kyeongin.com

모든 생명체가 그렇듯, 사람은 물 없이 살 수 없다. 아주 오래전부터 사람들은 물맛 좋은 곳을 골라 터를 잡고 살았다. 800년 전 고려의 수도 강화도 역시 마찬가지였다. 갑작스레 수많은 사람이 지금의 강화읍과 그 주변으로 모여들었는데 그때 그들은 어디서 물을 조달했을까.

강화읍에는 강도(江都) 시기의 이야기를 간직한 우물과 샘터가 있다. 이곳에서는 여전히 맑은 물이 샘솟고 있다.

송악산 남쪽 고려궁지 입구에서 왼쪽으로 돌아 강화산성 북문인 진송루(鎭松樓) 가는 길을 오르다 보면, 고려궁지 서편 담장 가까이에 왕자정(王子井)이라 불리는 우물이 있다. ‘왕자의 우물’이라는 그 이름처럼 고려 때 궁중에서 먹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이 우물 주변 마을을 왕자동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지금, 왕자정은 얼핏 보기에도 사람이 쓰지 않는 버려진 우물이다. 도로에서 약 30m밖에 떨어져 있지 않다. 고려시대 궁중 우물이어서인지 크기는 작지만 잘 다듬은 장방형의 돌을 쌓아 만들었다. 앞면의 트인 부분은 가로 80㎝, 세로 80㎝ 정도이고, 안쪽은 측면이 110㎝, 정면이 80㎝ 정도다. 우물 바닥의 뽀얀 모래흙이 훤히 보일 정도로 물은 맑다. 수면까지의 깊이는 1m 정도다.

왕자정의 위쪽에는 아직도 집이 몇 채 있다. 왕자정은 불과 몇십 년 전까지만 해도 동네 사람들이 이용하는 마을의 공동 우물이었다. 우물로 가는 도로변에는 같은 이름을 내건 음식점이 성업 중이다. 오래전부터 왕자정은 이 동네의 상징물처럼 돼 있었다.

강화읍 고려궁지 서쪽 담벼락 옆에 있는 고려 궁궐에서 먹었다는 왕자정. 지금은 쓰지 않는다. 2026.3.23 /정진오기자 schild@kyeongin.com
강화읍 고려궁지 서쪽 담벼락 옆에 있는 고려 궁궐에서 먹었다는 왕자정. 지금은 쓰지 않는다. 2026.3.23 /정진오기자 schild@kyeongin.com

진송루를 나가면서 2시 방향으로 멀지 않은 곳, 송악산 북사면에는 오읍약수(五泣藥水) 터가 있다. 강화로 도읍을 옮기고 내성을 쌓을 때 별안간 벼락이 떨어지더니 바위가 깨지면서 샘물이 용솟음쳐 일꾼들이 시달리던 갈증을 풀었다는 얘기가 전한다. ‘오읍’이라는 이름은 몽골군의 침입으로 수도를 옮기게 되자 하늘이 울고, 땅도 울고, 신도 울고, 왕도 울고, 백성도 울었다 하여 생겨났다고 한다. 지금도 세 개의 꼭지에서 끊임없이 물줄기를 뿜어내고 있다.

오읍약수 터에서는 조강 건너 북녘이 무척 가까이 보이는데, 강도 시기 피란민은 물론이고 800년 뒤 한국전쟁의 피란민 또한 이곳에서 물을 마시며 떠나온 고향 땅을 생각했을 게다.

왕자정과 오읍약수 터는 송악산 남쪽과 북쪽에서 따로 솟아나는데 이 둘을 한꺼번에 살피다 보면 송악산 깊은 곳 하나의 물길이 남과 북, 양쪽으로 통하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오읍약수 터를 알리는 표지석. 2026.3.23 /정진오기자 schild@kyeongin.com
오읍약수 터를 알리는 표지석. 2026.3.23 /정진오기자 schild@kyeongin.com

사람들은 샘을 찾아낸 뒤 자연 상태 그대로 그냥 두지 않았다. 물을 좀 더 담아 두기 위한 시설을 갖추었고, 그게 우물이 되었다. 고려시대 사람들은 단순히 먹는 물을 얻기 위해서만 우물을 만들지 않았다. 1123년 고려에 사신으로 왔던 서긍의 ‘고려도경’에 보면, 고려인들은 아침에 일어나면 가장 먼저 목욕을 한 뒤 집을 나섰다. 그 목욕물은 우물에서 길어다가 썼을 터인데, 우물 위에는 도르래를 달아 물통으로 길어 올렸다. 그 물통은 배 모양과 비슷하게 생겼다.

강도 시기 강화도의 우물과 샘은 어땠을까. ‘동국이상국집’에 전해오는 이규보의 노래가 있어 지금 우리는 그때의 강화도 우물과 샘을 떠올릴 수 있다.

강화도로 수도를 옮긴 지 4년, 이규보가 69세 되던 1236년에 그는 ‘집 뒤에 작은 못을 팠다(舍後開小池)’는 제목의 시를 썼다. 날카로운 연장으로 바위 밑을 떨어냈더니 그 틈에서 찬물이 솟아났고, 그곳에 우물을 만들고 한 움큼 마셔보니 꿀맛이었다. 거기에서 열 걸음 떨어진 곳에 작은 못을 파서는 흐르는 우물물을 가두었다. 더위에는 멱을 감을 수 있고, 물 길어 나르는 고역도 덜 수 있도록 함이었다.

‘동국이상국집’에 보이는 이규보의 강도 시기 샘과 우물 관련 시는 6편 정도다. 우물을 거울 삼아 얼굴을 비춰 봤다는 얘기도 있고, 샘물이 마르니 술이 떨어졌다는 내용도 있다. 샘과의 대화 형식으로 쓴 5수도 전한다.

이규보의 우물 시와 왕자정, 오읍약수 이야기를 연결해서 보노라면, 강화도는 800년 전의 고려 이야기를 끊이지 않고 샘물처럼 솟아나게 하는 문화 샘터임을 실감하게 된다.

/정진오기자 schild@kyeongi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