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방연구원 첫 한·중 교류 의제… 인천시민의 삶 변화 준 조력자

 

‘21세기연구센터’로 1996년 3월 업무 시작

‘계양구 도시발전 과제’ 첫번째 프로젝트

中 다련경제연구중심 등 도시 교류 확대

역대 원장 “사회변화 앞장·AI 변화 주문”

시정발전 중장기 계획 등 행정 연계성 높아

미래비전 이행 ‘독립·안정성·예산’ 필요

그래픽/박성현기자 pssh0911@kyeongin.com/클립아트코리아
그래픽/박성현기자 pssh0911@kyeongin.com/클립아트코리아

“세계화, 정보화, 지방화 시대를 맞이해서 급변하는 세계질서에 적극적으로 대응해 나가기 위해서는 행정의 전문성 확보가 시급한 과제라고 판단됩니다. … (중략) … 재단법인으로 인천시정연구원을 설립하는 문제 등 다각적인 방안을 검토 중에 있음을 보고드립니다.” 1994년 12월1일 제30회 인천시의회 제2차 본회의에서 당시 이영래 인천시장(1994년9월~1995년6월 재임)은 이렇게 지방연구원 설립 계획을 밝히면서 인천의 싱크탱크 구상이 가시화됐다. 당시 인천 인구는 220만으로 1981년 직할시 승격 당시(114만명)보다 13년 만에 2배 가까이 증가했다. 인천은 ‘송도 해상신도시’(현 송도국제도시) 건설, ‘영종 신국제공항’(현 인천국제공항) 개발 등 대형 프로젝트의 실행을 눈앞에 두고 있던 때였다. 또 지방자치시대 개막을 앞두고 도시 간 경쟁 본격화가 예고된 상황에서 자체 정책 역량을 제고하는 것은 꼭 풀어야 할 과제이기도 했다. 서울에 가려진 ‘배후도시’에서 독자적 성장을 도모하는 ‘중심도시’로의 전환을 꾀하던 시기 인천연구원 설립 논의가 본격화됐다. 인천연구원은 인천 도시발전사(史)와 맞물려 성장한, 외부에 잘 드러나 있지 않지만 시민 삶과 밀접한 기관이다.

■ 새로운 밀레니엄 앞두고 출범한 인천연구원

인천연구원은 1996년 3월20일 김학준 원장이 취임하면서 공식 업무를 시작했다. ‘인천 출신’ 김 원장은 서울대 정치학과 교수, 12대 국회의원을 거쳐 단국대 이사장으로 재임 중 최기선 인천시장의 제안을 받아 초대 수장을 맡게 됐다.

인천연구원은 ‘인천21세기연구센터’란 이름으로 경기은행 연수지점(연수구 연수동)에서 출범했다. 새로운 밀레니엄을 앞둔 기대감과 지역 싱크탱크로서의 역할이 반영된 명칭이었다. 경기은행은 지방은행의 사회적 책임을 이행하는 취지에서 지점 2층(사무), 3층(연구) 공간을 제공하고 10억원의 출연금을 냈다. 첫 둥지를 튼 연수동은 ‘연수지구 택지개발’이 한창으로 각지에서 사람들이 밀려들어 활력이 넘치는 공간이었다.

인천21세기연구센터는 1997년 1월17일 ‘인천발전연구원’으로 명칭을 바꾸고, 같은해 3월5일 청사를 연수동에서 서구 심곡동 공무원교육원 건물로 이전해 연구 공간을 확충했다. 인천발전연구원은 2018년 4월23일 ‘인천연구원’으로 명칭을 변경하고 현재에 이르고 있다.

개원 30주년 맞은 인천연구원 전경. 2026.3.26 /김용국기자 yong@kyeongin.com
개원 30주년 맞은 인천연구원 전경. 2026.3.26 /김용국기자 yong@kyeongin.com

■ 지방분권형 자족도시 밑그림 제안

지방자치시대 개막과 함께 출범한 인천연구원은 지역에 특화돼 있는 독자적 연구 과제를 수행했다. 1996년 인천시가 의뢰한 첫 과제는 ‘인천시 환경보전 장기종합계획’이었고, 군·구에서는 계양구가 의뢰한 ‘계양 21세기 비전- 계양구 장기종합발전계획’이 첫 번째 프로젝트였다. 1995년 북구에서 분구된 계양구는 도시발전 과제를 인천연구원에 맡겼고, 비슷한 시기 인천시 역시 ‘2020 인천드림’ 프로젝트를 의뢰했다. 국가주도 성장에서 벗어나 지방분권형 도시의 밑그림을 그려야 하는 지방자치단체 입장에서 인천연구원이 중요한 정책 파트너로서 위상을 구축해 나갔다.

인천연구원은 서울의 그늘에 가려져 역량을 제대로 펼치지 못한 채 묻혀 왔던 인천의 잠재력을 발굴해 부각하는 일에 힘썼다. 1996년 10월 인천연구원이 주최한 학술심포지엄 주제는 ‘20세기 인천의 미래상-개발과 보전’이었다. 당시 심포지엄 참석자들은 인천이 외형적 성장 속도에 비해 도시 정체성과 미래상을 확립하지 못한 점을 지적함과 동시에 서해를 품고 있는 도시로서 성장 잠재력이 높다고 전망했다.

인천연구원에 따르면 1996~2025년(착수일 기준) 약 1천90건의 기획·현안·특별·수탁 등의 연구 과제를 수행했다. 개원 이후 2000년대까지는 도시계획·교통·폐기물·복지·산업 등 자족도시의 기초를 다지는 연구 과제가 많았다면 2010년대 이후부터는 청년·노동·탄소중립·건축·교육·여성 등의 분야까지 범위가 확대되는 흐름을 보였다.

인천연구원이 2001년 2월 ‘한중교류센터’를 개소하면서 국내 지방연구원 가운데 처음으로 ‘한·중 교류’ 의제를 설정한 것도 눈에 띈다. 다련경제연구중심, 칭다오사회과학원, 톈진사회과학원 등 연구 기관과 교류 관계를 구축하면서 도시 간 교류를 확대해 나갔다. ‘동북아시아 경제공동체’ 구상 속에서 인천을 자리매김하려는 시도가 인천연구원에서 꾸준히 이뤄지고 있다.

■ 역대 원장들이 본 인천연구원

인천연구원 개원 후 30년간 16명의 원장이 부임해 연구원을 이끌었다. 인천연구원 안팎의 의견을 들어보면 김학준 초대 원장은 연구원의 방향성을 정립했고, 이철규 2대 원장은 예산·조직의 기틀을 정립했다. 이인석 6·7대 원장은 연구 영역의 확대를 추진했고, 남기명 14대 원장은 공직사회와 연구원의 관계 정립에 공을 들였다.

인천연구원 원장 상당수는 임기를 채우지 못하고 교체됐다. 재임 기간이 3개월에 불과했던 사례도 있었고, 역대 원장의 절반가량이 임기 1년도 채우지 못했다. 연구원 수장의 교체 주기가 빨라질수록 연구기관의 ‘안정성’이 흔들릴 수밖에 없었다.

인천연구원은 개원 30주년을 맞아 낸 ‘30년사(史)’에서 역대 원장들을 만나 연구원의 미래 비전에 대한 제언을 들었는데, 그 내용 중 귀담아 들을 부분이 적지 않다.

이인석 6·7대 원장은 “지난 30년은 인천 스스로 자기 운명을 개척한 시대였고, 그 발전에 연구원이 중요한 동력을 제공했다”며 “이제는 연구원이 인천 발전의 심판자 역할을 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용식 16·17대 원장은 “시민의 재원으로 운영되는 기관에는 엄청난 책임이 따른다. 연구원이 시민사회의 신뢰를 얻기 위해서는 사회변화에 앞서 대응하는 조직이 돼야 한다”고 했다.

AI 시대 변화에 따른 연구원의 변화를 주문하는 제안도 있었다. 김민배 12대 원장은 “AI 시대 산업구조에 맞는 행정조직과 정책이 필요하다”고 했고, 남기명 14대 원장은 “AI 시대의 연구원은 무엇을 할 것인가, 이 질문이 앞으로 더 중요해질 것”이라고 말했다.

인천연구원은 30년 역사에 걸맞은 싱크탱크로 성장해 왔다. 인천에 기반을 두고 연구 과제를 지속적으로 수행하면서, 행정기관에서 실행할 가능성이 높은 정책 과제를 도출하고 제안해 왔다. 인천연구원 설립·운영 조례에 따른 인천연구원의 역할은 ▲시정 발전 중장기 개발계획 ▲지방행정제도 개선 ▲지역 경제·사회지표 수립 ▲지방행정 관련 국내외 정보·자료 수집·출판·배포 ▲국내외 연구기관 교류·협력 등으로 인천시 행정과 연계성이 높을 수밖에 없다. 인천연구원이 미래 비전을 이행하기 위해 무엇보다 필요한 건 ‘독립성’과 ‘안정성’이다.

인천연구원 내부 사정을 잘 아는 한 인사는 “연구원은 과거 예산 삭감, 인력 구조조정 등으로 풍파를 겪은 적이 있다”며 “인천시 재정 상황에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지만, 지방연구원의 독립성 확보를 위해서는 안정적 예산 지원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김명래기자 problema@kyeongi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