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화8경에 눈길 못 주던 ‘속성 입시반’

 

관직 진출 시험공부 장소로 활용

구재생도 모아 ‘하과’ 통해 뽑아

조선, 정자 넘어 군사기지 역할

지난달 31일 오후, 화요일 평일이었음에도 연미정에는 마침 방문객 몇 명이 찾아 문화유산해설사의 설명을 듣고 있다. 2026.3.31 /정진오기자 schild@kyeongin.com
지난달 31일 오후, 화요일 평일이었음에도 연미정에는 마침 방문객 몇 명이 찾아 문화유산해설사의 설명을 듣고 있다. 2026.3.31 /정진오기자 schild@kyeongin.com

우리네 대부분은 살아가는 동안 수많은 시험을 거치게 마련이다. 입학시험이나 취직시험 준비가 얼마나 힘들면 시험지옥이란 말이 생겨났을까. 낮에는 바다 구경, 밤에는 달맞이, 언제나 아름다운 풍광을 즐길 수 있어 오래전부터 강화 8경의 하나로 손꼽혀 온 연미정(燕尾亭)이 고려 강도(江都) 시기, 관직 진출을 위한 시험공부 장소였다는 기록이 있어 눈길을 끈다.

16세기 왕명으로 펴낸 ‘신증동국여지승람’의 ‘강화도호부’ 편에 ‘연미정 공부’ 이야기가 실렸다. 연미정을 일컬어 ‘갑곶나루 위에 작은 산이 있고, 그 아래 바닷물이 나뉘어 흘러 제비 꼬리 같으므로 연미(燕尾)라 한다. 하도(下道)에서 조세 바치는 배가 지나다가 쉬는 곳이다. 고려 고종 31년 시랑(侍郞) 이종주(李宗胄)에게 명하여 구재생도(九齋生徒)를 이곳에 모아 놓고 하과(夏課)를 시켜 55명을 뽑았다’고 설명하고 있다.

병와(甁窩) 이형상(李衡祥, 1653~1733)의 ‘강도지(江都志)’ 연미정 대목에서도 ‘고려 고종이 시랑 이종주에게 명하여 이곳에 구재생도를 모아 놓고 하과를 시켰고, 그 55명의 명단이 있다’고 ‘신증동국여지승람’과 비슷하게 적고 있다. ‘강도지’에서는 또 연미정이 뒤에 황형(黃衡)의 집터가 되었고, 5대를 내려오다 조정에서 사들인 뒤 이곳에 월곶진을 설치했다는 내용까지 덧붙이고 있다.

연미정 양편에는 커다란 느티나무가 서 있어 색다른 볼거리를 제공했는데, 2019년 태풍 링링이 할퀸 피해로 한쪽 나무가 쓰러져 죽었다. 다행히 최근에 죽은 나무 둥치에서 새로운 나무줄기가 솟아오르기 시작했다. 2026.3.31 /정진오기자 schild@kyeongin.com
연미정 양편에는 커다란 느티나무가 서 있어 색다른 볼거리를 제공했는데, 2019년 태풍 링링이 할퀸 피해로 한쪽 나무가 쓰러져 죽었다. 다행히 최근에 죽은 나무 둥치에서 새로운 나무줄기가 솟아오르기 시작했다. 2026.3.31 /정진오기자 schild@kyeongin.com

두 기록 모두 연미정이 강도 시기 학생들을 모아 놓고 집중 학습을 시키던 특별 교육 공간이었음을 얘기하고 있다. 요즘으로 치면 연미정이 잘나가는 기숙학원의 단기 집중반 역할을 했던 셈이다.

고려 고종 31년이면 강화로 도읍을 옮긴 지 12년이 지났을 때인 1244년이다. 구재와 하과라는 말이 낯설게 보이지만 국어사전에 나오는 용어다. 구재는 아홉 군데의 학당을 일컫고, 하과란 고려 시대에 여름에 절에 가서 하던 공부를 말하는데 오뉴월에 시작하여 50일 동안 고문(古文), 고시(古詩)와 당송(唐宋)의 시를 외며 시부(詩賦)를 지었다고 한다.

전문가들은 여기 나오는 하과를 과거시험으로 해석하기도 하고 구재학당에서 하던 하과 공부로 보기도 한다. ‘55명을 뽑았다(抄五十五人)’는 의미가 하과에 참여할 인원을 선발했다는 얘기인지, 하과를 시킨 뒤 과거시험을 보아 뽑았다는 것인지가 불분명해서 생기는 시각 차이다. 고려시대사 전공자인 문경호 공주대 교수는 “그해 4월에 과거가 있었고, 9재생들을 대상으로 했다는 점이나 이종주에게 시켰다는 점을 보면 9재학당에서 하던 하과로 보는 게 무방해 보인다”고 경인일보에 밝혔다. 55명이 하과에 참여한 학생이든 연미정 하과를 마치고 과거에 통과한 경우이든, 아무튼 연미정의 하과를 거친 학생들은 대개가 고려 정부의 관료로 등용되었을 터이다.

연미정 앞은 한강에서 조강으로 이어지는 물길과 강화해협의 물길로 나뉘는 삼거리를 이룬다. 가운데 보이는 섬이 중립수역의 유도이고, 왼편이 북녘, 오른편 모서리가 김포반도이다. 2026.3.31 /정진오기자 schild@kyeongin.com
연미정 앞은 한강에서 조강으로 이어지는 물길과 강화해협의 물길로 나뉘는 삼거리를 이룬다. 가운데 보이는 섬이 중립수역의 유도이고, 왼편이 북녘, 오른편 모서리가 김포반도이다. 2026.3.31 /정진오기자 schild@kyeongin.com

‘신증동국여지승람’과 ‘강도지’에 1244년 임금 고종이 학생들을 연미정에 모아 놓고 공부(하과)를 시키라고 명령한 시랑 이종주는 당시 문장가 이규보와도 교유가 있었던 듯하다. 이종주와 주고받았다는 내용의 이규보 시 두 수가 ‘동국이상국집’에 전한다.

우리나라에 과거제도가 시작된 것은 고려 때이다. 신라에도 관직 진출을 위한 시험제도인 독서삼품과가 있었지만 본격적인 과거제는 고려 제4대 왕인 광종 때인 10세기에 시행됐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우리나라는 1천 년을 넘게 국가고시를 통해 인재를 뽑아 왔다.

우리나라 국가고시 제도를 살필 수 있게 하는, 그 역사적 현장 연미정은 조선시대를 거치면서 정자뿐만 아니라 군사기지 역할까지 해 왔다. 연미정은 월곶진의 월곶돈대 안에 들어앉아 있다. 월곶진이 생기기 전에는 앞에서 언급한 ‘강도지’의 설명처럼 황형(1459~1520) 장군의 집이었다.

연미정 앞 황형 장군 집터임을 알리는 표지석. 앞면과 뒷면. 뒷면에는 조선개국 501년 임진년(1892)에 세웠다고 표기해 놓았다. 2026.3.31 /정진오기자 schild@kyeongin.com
연미정 앞 황형 장군 집터임을 알리는 표지석. 앞면과 뒷면. 뒷면에는 조선개국 501년 임진년(1892)에 세웠다고 표기해 놓았다. 2026.3.31 /정진오기자 schild@kyeongin.com

연미정 바로 앞에는 이곳이 황형 장군의 집터였음을 알리는 자그만 비가 세워져 있다. 뒷면에는 ‘조선개국 501년 임진(朝鮮開國 五百一年壬辰)’이라 써 놓았다. 1892년 임진년에 세웠다는 얘기다. 500년 조선의 불빛이 꺼져가던 시기다. 연미정 앞 황형 고택 표지석에는 그 풍상을 견딘 고태(古態)의 멋이 있다.

/정진오기자 schild@kyeongi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