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2년 사라예보에 잔혹한 공격

참사에 슬픔 잠긴 스마일로비치

첼로를 들고 포화속 걸어들어가

22일간 연주… 종전까지 이어져

송하백 칼럼니스트
송하백 칼럼니스트

1992년 4월. 사라예보의 봄은 참혹했다. 끔찍한 ‘인종청소’가 자행된 보스니아 내전 중 사라예보를 향한 공격은 특히 잔혹했다. 세르비아계 군대가 매일 폭격을 쏟아붓고 민간인을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조준 사살하면서 ‘발칸의 보석’이라 불리던 사라예보는 순식간에 지옥으로 변했다. 남은 것은 화염과 시체, 잿더미가 된 건물의 잔해와 사람들의 비명뿐이었다.

그런데 전쟁 발발 두 달 후. 사라예보를 취재 중이던 종군기자 존 F. 번스는 이 생지옥에서 믿기 힘든 광경을 목격한다. 그는 이 사건을 즉시 타전했다.

‘…건물들이 사방에서 폭발하는 가운데, 정장 차림에 덥수룩한 수염을 기른 한 남자가 바세 미스키나 거리 한가운데에 플라스틱 의자를 펼쳤다. 그는 첼로 케이스에서 첼로를 꺼내 알비노니의 아다지오를 연주하기 시작했다. 청중은 단 두 명뿐이었다. 그러나 공연이 끝나기도 전에 두 명 다 문틈 사이로 도망쳐야 했다.’(1992년 6월7일 ‘도시의 죽음: 사라예보를 위한 애가’, 뉴욕타임스)

남자의 이름은 베드란 스마일로비치. 사라예보 오페라단에서 활동하던 첼리스트였다. 그는 왜 첼로를 들고 포화 속으로 걸어 들어갔을까.

번스가 스마일로비치를 만나기 12일 전, 베이커리 가게에서 빵을 사기 위해 줄을 서 있던 민간인들이 폭격당하는 사건이 있었다. 이 일로 무고한 시민 22명이 목숨을 잃었다. 가게 앞에 살던 스마일로비치는 눈앞에서 벌어진 참사에 큰 충격을 받고 슬픔에 잠긴 채, 자신의 역할을 고민했다. 그러다 첼로를 들고 거리로 나갔다. 그렇게 그날 이후 22일간, 그는 매일 무너진 가게 터에 앉아 음악을 연주하며 시민들을 위로했다.

스마일로비치의 이야기는 곧 전 세계에 알려졌다. 사연을 듣고 가장 먼저 행동에 나선 이들은 정치인들이 아니라 예술가들이었다. 명망 높은 비평가 수전 손택은 사라예보를 찾아 배우들과 촛불을 켜고 연극 무대에 올랐고, 전쟁 종식을 위한 국제 사회의 개입을 촉구하는 글을 끊임없이 발표했다. 미국의 가수이자 인권운동가 조앤 바에즈는 방탄조끼를 입고 사라예보의 방공호와 병원에서 노래를 불렀으며, 세계적인 지휘자 주빈 메타는 폐허가 된 사라예보 국립도서관에서 사라예보 오케스트라, 합창단과 진혼곡을 연주했다. 이 공연은 전 세계로 생중계됐다. 이 외에도 테너 루치아노 파바로티, 첼리스트 요요 마 등이 보스니아 내전의 참상을 알리는 데 동참했다. 이러한 움직임이 대중의 반향을 일으키면서 서구 사회가 보스니아의 비극에 침묵해서는 안 된다는 국제적 여론이 점차 형성되었고, 이 여론은 보스니아 내전을 외면하던 미국과 유럽 국가들을 압박하는 토대가 되어 나토(NATO)의 개입과 데이턴 협정을 통한 종전을 끌어냈다. 한 음악가의 용기가 세계인의 연대로 확장되어 전쟁 종식으로까지 이어진 것이다.

이 기적은 오직 음악만으로 이뤄진 것은 아니었으나 또한 음악 없이는 이뤄질 수 없었다. 스마일로비치의 음악은 전쟁이라는 거대한 폭력에 맞선 한 명의 유약한 인간을 목격한 인류의 형언할 수 없는 감정을 증폭시켰다. 대중은 그의 용기와 인류애에 감화되는 한편 전쟁을 방관하는 것 또한 전쟁에 가담하는 것임을, 그리고 이것이 얼마나 비인간적이며 야만적인 행위인지를 깨닫고 그의 용감한 행위에 동참함으로써 그와 같은 문명인의 지위를 회복하고자 했다. 이러한 인류 공통의 심리는 전쟁터 바깥의 사람들을 평화를 추구하는 공동체 안으로 집합시켰고, 이렇게 형성된 목소리는 정치인들을 압박하는 힘의 기반이 됐다. 이 역사적 사건에서 음악은 사회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제시하고, 세계인을 이에 공감하게 하는 가장 강력한 비언어적 매개체였다.

스마일로비치는 22일간의 연주가 끝난 후에도 사라예보 곳곳에서 첼로를 연주했다. 그리고 내전이 끝날 무렵에야 이곳을 탈출해 북아일랜드로 떠났다. 수만 명의 목숨을 앗아간 보스니아 내전의 상처를 위로하고 종전의 기적을 일으킨 ‘사라예보의 첼리스트’. 그가 우리에게 남긴 것은 애도와 평화 수호의 메시지만이 아니라, 우리가 문명인으로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말하는, 분명한 인류애적 메시지였다.

/송하백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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