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네스코가 올해를 백범 김구 선생 탄생 150주년을 기념하는 해로 선정했다. 상해 임시정부 주석에 대한 평가가 아니다. 청년 김구가 1896년 ‘치하포 사건’으로 2년 동안 인천 감리서 감옥에 갇혔을 때 동료 수감자들을 교육했고, 해방 후 귀국해 전재민 자녀들을 위한 학교를 설립한 사실을 주목한 것이다. 그런데 김구와 각별한 인연을 지닌 인천은 뜻밖에도 잠잠하다. 김구 선생이 두 차례 옥고를 치르며 민족지도자로 단련된 인천감리서터는 여전히 변변한 역사적 위상조차 부여받지 못하고 있다.
인천감리서는 개항 이후 조선 정부가 통상·외교·치안·사법을 맡기 위해 설치한 근대 행정기구였다. 동시에 김구 선생이 명성황후 시해사건을 듣고 분노하여 일본인 스치다를 살해한 ‘치하포 사건’으로 체포 수감되어 첫 옥살이를 한 곳이다. 1897년 탈옥에 성공하였으나 ‘안악사건’으로 다시 체포되어 인천 감옥으로 이감돼 축항공사 노역까지 했던 장소다. 이곳은 독립운동가의 유적지를 넘어 개항과 식민화, 저항과 각성이 교차한 대한민국 근대사의 기억저장소이다.
현재 한일조계지 계단 인근에는 김구 거리가 조성돼 있다. 그러나 이 사업은 역사적 정합성과 장소성에 대한 충분한 검토 속에서 추진됐다고 보기 어렵다. 김구 거리에 조성된 동상이나 조형물들의 디자인이나 진정성에 의문이 제기되고 있으며, ‘노역장’ 재현도 장소 해석의 왜곡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는 실정이다.
인천감리서와 감옥, 탈옥 경로, 축항 노역 현장에 대한 철저한 고증부터 다시 해야 한다. 그 토대 위에서 인천감리서터를 독립운동 사적지로 지정하고, 이미 조성된 김구 거리와 관련 시설도 전면 재검토해야 한다. 잘못된 해석은 바로잡고, 시민이 현장의 의미를 정확히 이해할 수 있는 자료관이나 안내 체계를 갖춰야 한다.
인천감리서터는 조선이 변화하는 국제 정세와 국제 통상업무를 능동적으로 대처하려 했던 행정기구가 있었던 곳으로, 한국 개항사 연구에도 중요한 장소이다. 3·1운동 당시 한성임시정부 수립을 위한 전국13도 대표자 회의가 열렸던 ‘만국공원도 인근에 있다. 김구는 인천감리서 옥중에서 국제적 지식을 얻었으며 김구라는 이름도 인천의 민족운동가 유완무로부터 받았다. 김구선생이 백범일지에 “의미심장한 역사 지대”라고 특별히 밝혔던 인천의 관련 유적지는 독립운동의 장소로 가꾸어나가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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