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민지화 첫걸음, 1876년 시점으로 봐야

 

‘심행일기’ 최초완역 김종학 교수

메이지유신, 권력 관계의 재설정

정한론에 힘 실어준 운요호사건

‘自主’ 자의적 해석, 불평등 의미

지난 17일 오후 인천시립박물관에서 열린 강화도조약 150주년 연속 특강 세 번째 강의에서 김종학 서울대 교수가 ‘조선이 기록한 강화도조약’을 주제로 강연하고 있다. 2026.4.17 /인천시립박물관 제공
지난 17일 오후 인천시립박물관에서 열린 강화도조약 150주년 연속 특강 세 번째 강의에서 김종학 서울대 교수가 ‘조선이 기록한 강화도조약’을 주제로 강연하고 있다. 2026.4.17 /인천시립박물관 제공

인천시립박물관이 강화도조약 150주년을 맞아 마련한 연속 특강 ‘강화도조약을 되돌아보는 세 가지 방법’의 마무리 세 번째 강의가 지난 17일 오후 시립박물관 석남홀에서 열렸다.

이 시간에는 김종학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가 나와 ‘조선이 기록한 강화도조약’이라는 주제로 강연했다. 김 교수는 강화도조약 당시 일본 측과 교섭을 벌인 신헌(1810~1884)이 쓴 ‘심행일기(沁行日記)’ 2권을 2010년 최초로 완역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이때 ‘심행일기’가 완역되기 전까지는 주로 일본 쪽 시각에서 강화도조약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조선 측의 관련 문서가 많이 드러나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김 교수는 “(‘심행일기’를 번역하기 전까지는) 그동안 일본인 시선에 의거해 강화도조약을 연구했는데, 번역 과정에서 그동안의 (강화도조약에 대한) 느낌과 달랐다”고 했다.

강화도조약을 강제하기 위해 군함을 몰고 왔던 일본도, 그들의 출현에 깜짝 놀라 조약에 임했던 조선도 서로 제대로 된 준비 없이 조약 체결에 임했다는 게 김 교수의 판단이다.

김 교수는 요즘 세계를 발칵 뒤집어 놓고 있는 미국·이스라엘과 이란 전쟁이 언제 끝날지, 어떻게 전개될지 앞으로의 일을 지금 당장 알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강화도조약 체결 당시에도 30여 년 뒤 일본에 국권을 빼앗길 것이란 점을 전혀 예측할 수 없었다고 했다. 그래서 강화도조약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1910년 국권 피탈이라는 결과론적 관점에서 1876년의 강화도조약을 바라볼 것이 아니라, 1876년이라는 그 시대·그 시점으로 봐야 한다고 강조했다.

김 교수는 이날 크게 세 가지 측면에서 강의를 풀어갔다. 강화도조약 이전 일본에서 있었던 메이지유신, 강화도조약의 직접적인 계기가 된 운요호사건, 그리고 강화도조약 체결 당시 기록인 ‘심행일기’.

일본은 메이지유신으로 인해 실제 정치권력이었던 쇼군이 상징적 권력에 머물러 있던 천황에게 자신의 권력을 반납하면서 천황이 정치의 전면에 등장하게 되었는데 이때 조선과의 문제가 발생했다고 김 교수는 설명했다. 조선 측에서는 그동안 실질적 권한을 갖고 있던 쇼군과 외교 관계를 맺어오면서 조선 임금과 쇼군이 대등한 교린 관계의 상징이었는데, 쇼군이 천황으로 바뀌면서 조선 임금과 천황과의 관계 설정이 애매해졌다는 얘기다. 이 때문에 조선과 일본의 외교 관계가 단절되었고, 그게 8년이나 이어지는 사이 일본에서는 조선을 정벌해야 한다는 정한론이 비등했다고 한다.

일본이 메이지유신 이후 엄청난 정치 변혁을 겪는 과정에서 운요호사건이 일어났는데, 김 교수는 강화도조약을 촉발시킨 운요호사건의 진상이 그동안 알려진 것과는 달리 운요호 함장의 최초 해군성 보고서가 2002년에 발견되면서 새롭게 드러나게 됐다고 설명했다. 일본이 주장해 오던 것과는 달리 우발적 사건이 아니고, 일본 정부에 조선의 군사력이 형편 없음을 보여줌으로써 정한론에 힘이 실리게 하려는 정한론자들의 의도였다는 게 김 교수의 시각이다.

강화도조약 체결의 중심에는 개화파의 비조로 불리는 박규수(1807~1877)가 있었는데 박규수는 ‘자존심만 내세우다 전쟁이 일어나면 그 피해는 고스란히 백성에게 돌아간다’는 생각으로 강화도조약을 성사시켰다고 김 교수는 설명했다. 강화도조약의 표현 중 가장 문제가 되는 ‘자주(自主)’의 해석 차이도 양국은 서로 알면서도 그렇게 표기했다고 김 교수는 보았다.

이 ‘자주’라는 표현을 일본이 자의적으로 해석하고 악용함으로써 강화도조약이 불평등하게 됐다는 게 김 교수의 시각이다. 김 교수는 강화도조약 체결 이후 10년 사이에 우리가 부국강병을 했어야 일본의 조약 악용을 막을 수 있었는데 그렇지 못하는 바람에 강화도조약은 식민지화의 첫걸음으로 남게 됐다고 평가했다.

/정진오기자 schild@kyeongi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