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년 세월을 선율로 빚은 PDJ의 진심
무명 밴드의 친정집, 인디음악의 산실
스승 김광한이 남긴 팝의 유산과 눈물
끝나지 않을 라디오, 젖은 낙엽의 온기
알고리즘은 흉내 못 낼 인간 DJ의 선곡
1980년대 MTV의 등장을 예견한 영국 뉴웨이브 밴드 버글스(The Buggles)의 ‘Video Killed the Radio Star’(1979)는 제목과 동일한 후렴 가사로 라디오의 종말도 예고했다. 그로부터 47년이 지난 지금, 기세등등하던 MTV조차 유튜브에 밀려 지난해 영미권 팝의 상징인 영국에서 폐국했다.
라디오는 살아남았다. 그것도 생방송으로 여전히 듣는 이에게 가닿고 있다. 지난 14일 오후 2시가 조금 지난 시각 경인방송 스튜디오에서 ‘박현준의 라디오가가’ 생방송을 마치자마자 만난 박현준 PDJ는 “국가적 위기 같은 큰 문제가 생기면 전기나 인터넷은 끊길 수도 있지만, 라디오 전파는 끊기지 않는다”며 “라디오는 끝나지 않는다. 젖은 낙엽처럼 최후까지 생존하는 매체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2006년 4월3일 첫 방송을 시작한 팝 음악 전문 라디오 프로그램 ‘박현준의 라디오가가’가 20주년을 맞았다. 지역 라디오 방송국으로는 전국에서도 흔치 않은 사례다. 박현준 PDJ는 정통 디스크자키(DJ·Disk Jockey)다. 국내 모든 방송사를 통틀어 한 명의 DJ가 한 프로그램을 20년 이상 꾸준히 진행한 사례도 극히 드물다. 20년 이상 장수 DJ는 배철수(배철수의 ‘음악캠프’), 양희은(‘여성시대’), 박소현(‘박소현의 러브게임’), 이현우(‘이현우의 음악앨범’) 정도다. 이 가운데 정통 DJ 출신 진행자는 박현준이 유일하다. 그는 DJ가 아니라 PDJ라 불린다. 프로그램 기획·제작자인 프로듀서(Producer)와 진행자인 DJ를 합쳤다는 의미다. 이 또한 국내에선 처음 있었던 시도다.
DJ는 음악 사이 간극이나 흐름을 파악하면서 자연스럽게 음악을 소개하는 전문가
박현준 PDJ는 “정말 20년 동안 ‘박현준의 라디오가가’를 진행할 줄 상상도 못했다”며 “방송국도, 프로그램도 어려운 과정을 거치며 이제는 가족 같은 청취자들과 함께 했기에 지금까지 올 수 있었다”고 20주년 소감을 말했다.
지난 3일 20주년 특집 방송에는 현재 국내에서 가장 인기 있는 록 밴드 잔나비가 출연했다. ‘박현준의 라디오가가’는 팝 음악 방송이지만, 2009년부터 십수 년 동안 국내 인디 밴드를 초대해 라이브 공연을 선보이는 ‘언플러그드쇼’ 코너를 운영했다. 그래서 라디오가가는 인디 음악의 산실이라 불린다. 잔나비는 무명 시절부터 이 코너에 자주 출연했다. 잔나비 팬들은 라디오가가를 ‘친정집’이라 부른다고 한다.
“‘언플러그드쇼’는 지금은 인디씬을 대표하는 팀이 된 검정치마가 무명일 때 소개한 것을 시작으로 최근까지 이어졌어요. 국카스텐, 데이브레이크, 잔나비, 터치드를 비롯해 로맨틱펀치도 무명 시절부터 많이 출연한 팀입니다. 지금이야 인기를 얻고 있는 인디 밴드가 많지만, ‘언플러그드쇼’를 시작한 2010년대까지만 해도 인디 밴드의 지상파 방송 출연은 무척 어려웠습니다. 그때 만나 성장한 인디 뮤지션들을 보면 참 뿌듯해요.”
박현준 PDJ는 20년 동안 방송을 이어온 공을 자신의 스승이자 한국 1세대 팝 음악 전문가인 고(故) 김광한(1946~2015) DJ에게 돌렸다. 김광한 DJ는 라디오 프로그램 ‘김광한의 팝스 다이얼’(KBS) 등을 진행하며 1980년대 국내 팝 음악 열풍을 이끈 주역이다. 박현준 PDJ가 김광한 DJ를 만난 건 2003년이다. 당시 김광한 DJ가 진행한 라디오 프로그램 ‘골든 팝스’(KBS)에서 개최한 아마추어 DJ 선발대회에 출연해 김광한의 눈에 띄었다.
“취업에 성공해 회사로 출근하기 직전 김광한 선생님이 ‘방송 쪽으로 한 번 해보라’고 권유했어요. 고심 끝에 김 선생님의 프로그램 음악 작가로 라디오에 입문했습니다. 지금이야 방송인을 양성하는 ‘방송 아카데미’가 있지만, 그때는 김 선생님처럼 ‘다운타운 DJ’ 출신 라디오 DJ들이 도제식으로 가르쳤어요. 선생님께 DJ에 대해 배우는 과정이 어찌나 힘들었는지 원형 탈모 증상을 겪기도 했습니다.
선생님은 늘 ‘밴드 음악이 잘 돼야 그 나라 음악이 살아난다’고 강조했어요. 그 영향으로 ‘언플러그드쇼’를 끌고 나갔습니다. 김 선생님도 1980년대 백두산, 부활, 시나위 등 언더그라운드에 있던 헤비메탈 밴드들을 많이 챙겨 줬습니다. 팝 전문 방송이지만, 인디 뮤지션들에 주목했던 이유입니다. 제가 PDJ이기에 가능했습니다.”
김광한 DJ는 박현준 PDJ를 아들처럼 아꼈다. 2014년께 김광한 DJ가 ‘박현준의 라디오가가’에 게스트로 출연한 적이 있었다. 스튜디오 안에서 믹싱 콘솔을 조정하고 있는 박현준 PDJ를 보고 김광한 DJ는 “제멋대로 하는구먼”이라고 우스갯소리를 하면서 “그러니까 사람들이 좋아하네”라고 슬쩍 칭찬의 말을 던졌다고 한다. 김광한 DJ가 작고한 2015년 7월9일에도 박현준 PDJ는 생방송 중 소식을 접했다. 방송을 이어가기 어려울 정도로 눈물이 터져 나왔다고 한다. 슬하에 자녀가 없던 김광한 DJ의 장례식에서는 박현준 PDJ가 상주 역할을 했다.
김광한 ‘팝스 다이얼’ 시절 경인방과 연인
iTV 폐국 위기에 시민들과 방송 복구 운동
“오래된 애청자들은 함께 고생한 동지들”
“50주년까지 방송… 청취자들과 약속”
박현준 PDJ는 김광한 DJ가 경인방송에서 다시 시작한 ‘팝스 다이얼’(2004~2008년)을 진행할 때부터 음악 작가로 경인방송과 인연을 맺었다. 그는 ‘경인방송 살리미’ 출신이기도 하다. 방송위원회(방송통신미디어위원회의 전신)가 2004년 말 iTV(경인방송)의 재허가를 거부하면서, iTV는 그해 12월31일 TV와 라디오 방송을 모두 중단했다. 방송국이 폐국 위기에 처하자 직원들과 지역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경인방송 살리미’라는 이름의 방송 복구 운동을 펼쳤다. 그 겨울 박현준 PDJ도 지하철역 입구 앞에서 다른 살리미들과 함께 지역 방송을 살리자는 내용을 담은 전단지를 돌렸다. 방송 중단 2개월 만인 2005년 3월1일 오후 2시 라디오 방송(iFM 90.7㎒)을 재개할 수 있었다.
“당시 저와 함께 경인방송 살리미 전단지를 돌리던 애청자의 등에 엎혔던 갓난아이가 이제 군 복무를 마치고 대학에 복학했어요. 오래된 애청자들은 단순한 ‘청자’가 아니라 폐국할 뻔한 지역 방송국을 살리기 위해 함께 고생한 동지들이죠. 그러다 보니 가족의 대소사까지도 알고 지냅니다. 라디오가가가 20년을 버틴 원동력이기도 합니다.”
흔히 라디오 프로그램 진행자를 DJ라 부르지만, 그것은 MC(Master of Ceremonies)와 DJ를 구분하지 않은 오류에 가깝다는 게 박현준 PDJ의 설명이다.
“일반적인 진행자를 일컫는 MC는 아나운서처럼 정확한 정보 전달과 진행에 초점을 맞췄다면 DJ는 음악과 음악 사이 간극이나 흐름을 파악하면서 자연스럽게 음악을 소개하는 전문가라는 측면에서 다릅니다. 이를테면 비틀스(The Beatles)의 ‘Let It Be’는 천 번 만 번을 들었지만, 방송하기 전에 또 모니터링을 합니다. ‘Let It Be’를 틀기 전과 후 어떠한 음악을 들려줘야 할지를 고민하고 결정해야 하는 것이 바로 DJ이기 때문입니다. 일반 진행자는 이러한 고민을 하지 않죠.”
주말을 제외하곤 생방송이 원칙이다. 4일 이상 연속으로 쉬어 본 적이 거의 없다고 한다. 그날의 뉴스나 날씨를 생각하며 청취자에게 들려줄 곡을 고른다. 인공지능(AI) 알고리즘이 아닌 ‘인간 DJ’의 선곡은 시간과 공간, 세대를 아우르는 감성을 전달한다. 그가 세월호 참사 때 아프게 선곡했던 노래들처럼.
박현준 PDJ는 지금까지 방송에서 영국 록 밴드 퀸(QUEEN)의 노래를 가장 많이 튼 것 같다고 했다. 그는 “50주년까지 방송을 하고 싶고, 청취자들과도 그렇게 약속했다”며 “천국에서 퀸의 보컬 프레디 머큐리를 만나면 밥 한번 사겠다”고 웃으며 말했다. 그러나 퀸의 대표곡 중 하나인 ‘Radio Ga Ga’는 방송에서 가장 적게 튼 노래이다. 방송명이자 방송 시작을 알리는 시그널 음악이기 때문이다. 가장 적게 틀었지만, ‘박현준의 라디오가가’에 가장 어울리는 곡이기도 하다. ‘Radio Ga Ga’에 이런 가사가 있다.
“You had your time, you had the power(당신에게는 당신만의 시대와 힘이 있었죠) / You’ve yet to have your finest hour, Radio(라디오여, 하지만 당신의 가장 멋진 순간은 아직 오지 않았어요)”
■ 박현준 PDJ는?
한국 1세대 팝 음악 전문가이자 DJ 김광한에게 발탁돼 2003년 그가 진행하는 여러 방송에서 음악 작가로 활동했다. 2005년 iTV 경인방송 ‘박현준의 음악편지’ 진행을 맡아 DJ로서 본격적으로 활동했으며, 2006년 4월부터 현재까지 20년째 경인방송 ‘박현준의 라디오가가’ 프로듀서 겸 진행자(PDJ)를 맡고 있다. 한국대중음악상 선정위원 등을 역임했다.
/박경호기자 pkhh@kyeongi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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