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픈 걸 쓰고 싶다는 나의 대답

사람들은 자기연민이라 말한다

예술가는 자기확신이 크다는데

그거라도 가지면 좀 어떠한가

이원석 시인
이원석 시인

먹고 살길이 막막해질 가능성이 농후하고 부귀영화와 사이가 나빠질 확률이 높아질 게 뻔하지만 시를 쓰는 것을 내 인생의 운명으로 받아들이자고 스스로 결심한 후 누군가 처음으로, 너는 무엇을 쓰고 싶냐고 물었을 때, 내 대답은 “슬픈 걸 쓰고 싶다”였다. 그 친구는 내 인생에서 처음으로 진지하게 내 문학관에 대해 질문을 던진 친구였다. “맞아, 우리는 아주 슬픈 걸 쓰자.” 약속을 했다. 그리고 그 말은 하나의 기준으로 내 마음에 자리 잡았던 것 같다. 그 친구는 일찌감치 슬픈 것을 쓰기 시작했다. 가끔 발표되는 그의 글들을 읽으며 울었다. 슬프구나. 나는 아주 오래, 슬픈 걸 쓰는 사람이 아니라 슬픈 사람으로 살았다. 그게 내 습관이 되고 인이 박여서 본성이 될 때까지.

슬픈 걸 쓰고 싶었다. 저기 밝은 햇살 아래 기뻐하는 사람들 말고, 아름다운 음악 속에서 반짝이는 사람들 말고, 뛰어난 재능으로 앞서가는 사람들 말고, 가난하고 우울하고 어둡고 슬프고 너절하고 막무가내고 무기력하고 무능력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쓰고 싶었다.

하지만 사람들은 이야기한다. “너 그거 동정이야.” 슬픔을 대상화하지 않고 동정하지 않고 쓰는 것은 무엇일까. 어렵지 않았다. 그것이 대상만의 이야기가 아니라 나의 이야기일 때, 내 이야기만큼 내 안 깊이 자리 잡은 이야기이면 되는 것 아닐까. 난 늘 가난했고 오래 우울했고 자주 슬펐으므로 어렵지 않았다. 내 슬픔을, 내 슬픔 같은 슬픔을, 그리고 너의 슬픔을 쓰고 싶었다.

하지만 사람들은 다시 이야기한다. “너 그거 자기연민이야.” 자신이 너무 불쌍한 사람, 그래서 자기 마음만 들여다볼 수밖에 없는 사람, 그러니 세상 모두가 자신의 슬픔을 알아주고 위로해주길 바라는 사람, 남의 슬픔을 돌아볼 겨를이 없는 사람, 제 살기에도 버거운 사람, 그런 것이 자기연민의 문학일 테다. 나조차 나를 연민할 수 없다니, 도대체 나 말고 누가 또 나를 연민해준단 말인가. 그런 사람이 있다면 애초에 구질구질한 감정에 빠지지도 않았을 텐데.

함정 같은 자신의 슬픔에서 빠져나오는 방법은, 어렵겠지만 스스로에게 긍정적인 희망을 주고 믿음을 주는 것이다. 아무도 믿어주지 않는 나를 내가 믿어주는 것이다. 눈빛들 속에서 위축되기만 하는 내가 나를 믿는다. 근거 없이, 반성 없이, 조건도 없이 나를 믿기로 한다. 그리하여 희박하고 가느다란 나에 대한 믿음을 기반으로 자기 확신이란 걸 나도 가져보는 것이다. 믿음을 기반으로 노력하고, 노력을 기반으로 결과를 얻으며, 결과를 기반으로 나를 다시 믿는다. 다시 믿게 되는 스스로에게 확신 비슷한 걸 느낀다. 그 확신을 동력으로 다시 노력하면 된다.

하지만 사람들은 다시 또 이야기한다. “예술하는 사람들은 자기 확신이 너무 강해. 비대한 자아를 어떻게 좀 해봐.” 가만 있어봐, 화가 나기 시작한다. 정말 어쩌라는 거지? 우리는 늘 아프고 슬프고 가난하고 힘든데, 슬픔을 동정하지도 동경하지도 못하고, 남들이 외면하는 내 아픈 상처 핥는 자기 연민도 안 되고, 그래서 힘 좀 내보려고 잘 믿기지도 않고 불안하기만 한데 힘을 내서 자기 확신이라도 가져보려고 하면 그것도 안 된다는 말인가? 자기 확신을 왜 가질까, 그것 말고는 아무것도 가진 게 없기 때문이다. 그러니 좀 가져도 되지 않을까.

하지만 세상이 자기 예술을 알아주지 않는다고 자신만의 방에서 자기 확신에 빠져 자기 예술을 애지중지 쓰다듬고 있다가 보면 우리가 익히 아는 ‘골룸’이 된다. 자신이 가진 반지가 너무 아름답고 귀하기 때문에 세상의 평가도 시선도 신경 쓰지 않으며, 누군가의 충고도 비난으로만 받아들여서 등을 돌리고 “마이 프레셔스!”를 외친다면 결국은 아끼던 동료도 반지도 예술도 잃어버리게 되는 것이다. 그럼 어떻게 할까. 동정도 자기연민도 자기확신도 없이 어디로 가야 하나. 오히려 동정도 하고 자기연민도 하고 자기확신도 하면서, 함께 걷는 동료를 믿고 함께 우는 사람들, 함께 싸우는 사람들과 연대하며 자기만의 방에서 나와 모험을 시작해야 하지 않을까. 프로도처럼 말이다.

/이원석 시인

<※외부인사의 글은 경인일보의 편집방향과 다를 수도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