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절마다 다양한 표정… 농토를 만나다
땀흘리는 농부·깊은 주름 노인 없이
인물 모습 지워내고 노동 흔적 채워
흙을 재료로 작품 제작 질감 살려내
지난 21일부터 인천 중구 ‘도든아트하우스’에서 열리고 있는 박정렬 기획전 ‘영원한 토지’. 작가의 작품 앞에 서면 마음이 고요하고 엄숙해짐을 느끼게 된다. 그 땅(土地)을 일궜을 누군가가 힘들여 애쓰고 수고했을 모습이 떠오르기 때문이다. 작가가 그려낸 작품 속 주인공은 분명히 대부분 논과 밭인 땅, 농부의 땅 농토(農土)이다. 작품 속 화면에 농부는 거의 등장하지 않는데, 작품을 감상하다 보면 결국 사람이 떠오르는 순간과 만나게 된다. 화폭에 등장하지는 않지만, 작가는 궁극적으로 그 땅을 일궈낸 사람의 모습을 보여주고자 한 것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1946년 전북 정읍에서 출생한 작가는 인천과 정읍을 오가며 작업을 하고 있다. 최근에는 주로 정읍에서 지내고 있다고 한다. 작품 속 토지는 계절마다 다른 다양한 얼굴 표정으로 관객과 만난다. 추수가 끝나고 난 후 그루터기를 품은 채 조용히 휴식을 취하고 있는 한겨울의 모습을 보여주기도 하고, 푸른 잎을 틔우는 역동적인 장면을 드러내기도 한다. 씨앗을 품고 있을 것으로 보이는 잘 정돈된 밭이랑이나, 모내기가 끝난 가지런히 정돈된 논의 모습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작품 속 화면 어디에도 허리를 숙여 땀 흘리는 농부의 모습이나 이마의 깊은 주름을 가진 노인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된 노동의 숨결이 생생히 전해지고 있는 상황은 어디에서 기인하는 것일까. 아마도 작가가 인물의 모습을 지워낸 자리에, 그들이 일궈낸 노동의 흔적을 채워 넣었기 때문일 것이다. 실제 박정렬 작가는 농사를 직접 지으며 작품 활동을 병행하고 있다고 한다.
“어설픈 농부 화가는 마음으로만 농사일에 바쁘다. 그림을 그리려 하면 농사일이 끼어들고, 농사는 때를 놓치면 망치는 일이라 때를 놓칠 수도 없어서 농사일을 하다 보면 그림 그릴 시간이 자연히 줄어들게 된다…(중략)…농사를 지으며 농토를 그리니 나보다 이 땅의 농토에 대하여 잘 아는 화가는 별로 없을 것 같다는 자신감으로 오늘도 ‘영원한 토지’를 그리고 있다”(2021년 작가의 말에서)
‘자신감’으로 표현했지만, 작품에서는 직접 농사를 짓고 그 결과를 겸허히 받아들이는 농부의 겸손함이 드러난다. 본인은 농부의 마음을 ‘순례자의 자세’와 같다고 말하고 있다.
작가는 자신의 일터인 농토의 흙을 재료로 사용하기도 한다. 흙을 작품의 색을 내는 재료로 사용하는 것은 결코 만만한 일이 아니다. 수없이 실패를 반복해야 방법을 찾아낼 수 있는 지난한 실험 과정을 거쳐야 하기 때문이다. 농사일만큼 힘든 작업이라고 한다. 밭에 씨를 뿌리고 농작물을 수확하는 과정만큼이나 흙을 재료로 쓴다는 일은 고된 과정이다. 이번에 전시 중인 몇몇 작품에는 흙의 질감이 그대로 묻어나기도 한다.
작가는 2003년 국립현대미술관 특별기획전, 2008년 미국 뉴욕 유엔(UN)주재 대한민국 대표부 갤러리, 금호미술관 초대전, 캄보디아국립박물관 초대전 등 대형 작품을 위주로 관객과 소통했다. 이번 전시는 평소 보기 힘든 박정렬의 작은 크기의 작품과 만나볼 수 있는 기회다. 전시는 오는 30일까지 이어진다.
/김성호기자 ksh96@kyeongi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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