美·이스라엘, 처참한 민간인 학살
유대인 고통, 가해 정당화 서사로
아렌트, 배제의 주체땐 비극 반복
‘사유 멈춘 상태’ 성찰 귀기울이길
나는 어린 시절 ‘안네의 일기’를 읽었고 성장하면서 하이네의 시와 카프카의 소설을 읽었으며 최근까지 필립 로스와 폴 오스터의 작품을 즐겨 읽었다. 독자들이 짐작하다시피 모두 유대인 작가다. 언젠가 내가 가르치는 교양과목의 교재를 편찬할 때 ‘환대’를 주제로 글을 싣게 되어 조너선 색스, 알랭 핑켈크로트, 임마누엘 레비나스 등 8명의 글을 뽑았는데 모두 유대인이었다. 결국 균형을 맞추기 위해 몇몇 글을 다른 글로 대체하기는 했지만 그 일은 내게 ‘환대’가 가장 절실한 이들이 유대인이라는 각인을 남겼다. 조너선 색스가 강조한 ‘차이의 존중’이나 레비나스가 말한 ‘타자의 얼굴’은, 아마도 유대인이 인류 역사상 가장 처절하게 배척당해 본 민족이었기에 그 누구보다 절실하게 길어 올릴 수 있었던 가치였을 것이다.
‘쉰들러 리스트’나 ‘책 읽어주는 남자’를 영화로 접하면서 유대인의 억울함과 나치의 잔인함에 치를 떤 기억은 나만 갖고 있는 것이 아닐 것이다. 글로 쓴 작품이든 영상 매체든 장르를 막론하고 유대인을 주제로 한 작품에서 찾을 수 있는 가치는 ‘고통받는 타자에 대한 응답’과 다른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내가 수십 년간 쌓아온 인문학적 상식이 불과 두달만에 완전히 무너져 버렸다. 미국과 이스라엘이 일으킨 전쟁에서 그들이 저지른 참혹한 민간인 학살을 목격했기 때문이다. 어떤 비극이 일어났는지 굳이 이 짧은 지면에 소개할 필요조차 없을 것이지만, 안네 프랑크가 믿었던 인간의 선함이나 레비나스가 이야기했던 ‘타자의 얼굴에 대한 책임’을 가장 잘 이해할 것 같았던 이들이, ‘환대의 철학’을 낳은 민족이, 어떻게 이토록 참혹한 ‘배제의 폭력’을 행사할 수 있단 말인가?
나를 고통스럽게 하는 것은 단순한 실망을 넘어, 내가 믿고 가르쳐온 ‘보편적 인류애’나 ‘문학의 힘’이 현실의 비극 앞에서 얼마나 무력한지 깨달았기 때문에 생긴 근본적 회의에 가깝다. 이런 회의는 역시 유대인이었던 예루살렘의 한나 아렌트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아이히만의 재판을 지켜보던 그에게 앞서 던져진 질문은 아마도 “칸트와 헤겔 같은 철학자, 바흐, 헨델, 베토벤 같은 음악가, 괴테, 실러, 횔덜린처럼 위대한 시인과 작가를 배출한 문명국 독일이 어떻게 인류를 학살하는 악마가 되었나?”였을 것이다.
이 질문에 아렌트는 인간의 악행은 악한 본성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사유의 무능력 때문에 일어나며 그런 무능력은 평범한 사람도 큰 악행을 저지르게 할 수 있다고 답했다. 아렌트가 본 아이히만은 괴물이 아니라 정상인이었고 가족에게는 자상한 아버지·의젓한 남편, 가까운 사람들에게는 친절한 이웃집 아저씨, 국가를 위해 일할 때는 탁월한 능력을 발휘하는 유능한 관료였다. 신뢰받는 동료이자 자상한 가장이었던 그에게 결여된 능력은 타인(유대인)이 겪는 고통을 상상할 능력의 부재였다.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이스라엘의 폭력은 “우리는 홀로코스트를 겪었기에 생존을 위한 어떤 폭력도 정당하다”는 피해자 민족주의에 기반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처럼 과거의 고통을 현재의 가해를 정당화하는 ‘닫힌 서사’로 사용할 때, 타자의 얼굴은 지워지고 오직 ‘나의 생존’만 남게 된다. 아이히만이 관료 체제 안에서 효율성만 따졌듯, 국가 안보 논리와 현대 전쟁의 첨단 무기체계가 평범한 젊은이들을 ‘사유하지 않는 기계’로 만든 것이다. 이는 아렌트가 경계했던 ‘무사유’의 전형이다.
과연 아렌트는 생전에 시오니즘(유대 민족주의)이 팔레스타인 원주민과의 공존 대신 배타적인 국가 건설로 치닫는 것을 우려했다. 그는 유대인들이 ‘환대’의 주체에서 ‘배제’의 주체가 되는 순간, 자신들이 겪었던 비극을 반복할 수 있음을 이미 통찰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아렌트는 우리에게 ‘누구나, 심지어 과거의 피해자조차도 사유를 멈추는 순간 아이히만이 될 수 있다’는 냉혹한 진실을 일깨워 주고 있다. 이 순간 이스라엘인들에게 필요한 성찰은 “지금의 당신들은 사유가 멈춘 상태다”라는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일이다.
/전호근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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