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시론에 일가 이룬 양수겸장

작품 속에서 세상은 ‘살만한 곳’

삶의 비극 감싸는 관용의 시선

한 시대 큰 그늘 같던 그를 기억

유성호 문학평론가·한양대 국문과 교수
유성호 문학평론가·한양대 국문과 교수

김종길(1926~2017) 시인은 경북 안동에서 태어나 혜화전문학교 문과를 거쳐 고려대학교 영문과를 졸업하였다. 1947년 경향신문 신춘문예로 등단하였고 영문학자로, 시인으로, 시론가로 일관된 삶을 살아온 큰 문인이다. 그는 ‘시론’(1965), ‘진실과 언어’(1974), ‘시에 대하여’(1986) 등으로 후학들에게 남다른 이론적 영향을 끼쳤고, 시와 시론에 모두 일가를 이룬 양수겸장이었다. 시집 ‘성탄제’(1969), ‘하회에서’(1977), ‘황사현상’(1986), ‘해가 많이 짧아졌다’(2004), ‘해거름 이삭줍기’(2008), ‘그것들’(2011) 등을 내놓았으니, 70년 가까운 시력에 비하면 매우 드문 과작이었다. 등단 시점에 쓰인 작품 ‘소’(1946)는 우리에게 그의 시적 경향에 대한 암시를 주는데, ‘네 커다란 검은 눈에는/슬픈 하늘이 비치고//그 하늘 속에 내가 있고나//어리석음이 어찌하여/어진 것이 되느냐?’라는 표현에 나타나듯이, 그의 시는 짧고 단아한 구도에 언어의 절제와 대상과의 정서적 교감을 담아가게 된다.

그는 자신을 규정하는 이미지즘 시학과 고전적 절제를 하나씩 천천히 완성해간다. 그의 시에는 삶의 비극적 장면들이 빈번하게 등장하지만 그것은 ‘그러나 세상은 살 만한 곳’(‘설날 아침에’)이라는 긍정적 세계관에 늘 포용되어 나타난다. 그만큼 그의 시는 삶을 평화와 관용의 시선으로 바라보았고, 자연스럽게 극기와 절제를 통해 정신주의의 극점에 다다랐다. 대표작 ‘성탄제’는 성탄절 무렵 도시에 내리는 눈을 바라보면서 어린 시절에 대한 회상과 현재의 감회를 대조적으로 그렸다. 인류 보편의 사랑을 육친애로 전환시키면서 서구적 의미의 성탄절을 한국적 의미의 성탄절로 보여주었다. 이 시편은 전체가 대비 구조로 짜여 있는데 ‘고향(시골)/객지(도시)’의 공간 대비, ‘유년/현재’의 시간 대비, ‘붉은색(산수유)/흰색(눈)’의 색채 대비, ‘서늘함(옷자락)/열(상기한 볼)’의 촉감 대비가 바로 그것이다. 인간사는 많이 변했지만, 옛날처럼 내리는 눈을 바라보면서 시인은 불현듯 아버지의 서느런 옷자락을 느끼고 아버지가 따오신 산수유 열매가 지금도 자신의 혈액에 흐르는 것이 아닐까를 묻는다. 여기에도 김종길 특유의 절제된 감각과 이미지들이 생생하게 표현되어 있다.

또 다른 대표작 ‘설날 아침에’는 삶이 비록 차갑고 험난해 보이지만, 그것을 살아가는 주체들이 착하고 슬기로운 태도로 임한다면 얼마든지 살아갈 만한 것이라는 긍정과 낙관이 스민 작품이다. 그에게 삶은 ‘말없이/간절한 목숨들이 고개 들고 있는 곳’(‘꽃밭’)이었다. 말없는 간절함이야말로 그가 살아가는 삶의 존재론적 표지였던 셈이다. 이러한 궁극적 긍정과 낙관은 그의 후기시 ‘매화’의 ‘살아있는 한 저버릴 수 없는 것을/잊지 않았노라고, 잊지 않았노라고,/매화는 어김없이 피어나는데,’라는 표현에서도 잘 나타난다.

‘고고’에서는 ‘북한산이/다시 그 높이를 회복하려면/다음 겨울까지는 기다려야만 한다’고 함으로써 고고함에 대한 갈망을 표현한 시인은 ‘그 고고한 높이를 회복하려면//백운대와 인수봉만이 가볍게 눈을 쓰는/어느 겨울날 이른 아침까지는/기다려야만 한다.’고 함으로써 인내와 기다림과 초월 의지가 높은 정신적 차원에서만 가능함을 노래하였다. 시인의 진정성과 형상의 밀도가 높은 정신적 차원에서 이처럼 단단하게 결속된 작품은 우리 시사에 흔치 않을 것이다.

김종길은 엄격하고 지적인 절제를 통해 시의 형식에 철저했던 이미지스트이자, 고고한 선비정신과 투명성을 지닌 고전적 시인이었다. 시인 스스로도 고백했듯이, 그의 선명한 이미지즘과 고전적 균정성은 한시(漢詩)의 기율과 방법에서 배운 바가 많았을 것이다. 그리고 서구 이론에 대한 정확한 이해와 그것의 다채로운 적용을 성취한 시론가로서도 그는 자신의 위상을 확고히 하였다. 그렇게 김종길 시인은 언어의 고전적 절제와 그것의 확장 가능성을 믿은 ‘언어의 사제’였던 셈이다. 탄생 100주년을 맞아, 언제나 우리에게 큰 그늘을 드리워주셨던 한 시대의 거수목(巨樹木)을, 서느런 옷자락으로 그리고 기린다.

/유성호 문학평론가·한양대 국문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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