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님에게 잔소리 퍼붓는 관리인

기분 나쁘다가 퍽 통쾌한 기분도

‘소비자가 왕’ 통하지 않는 이곳

할머니만은 끝내 친절하지 말길

최정화 소설가
최정화 소설가

요즘 목욕탕 가는 사람도 있냐는 놀림을 받으면서도 나는 종종 동네 목욕탕에 간다. 뜨거운 물에 몸을 담그고 긴장이 풀어지는 이완의 순간을 즐긴다. 목욕탕에서 가장 빛나는 시간은 차가운 음료를 마시는 시간. 나는 우유를 하나 사서 절반은 마시고 나머지 절반은 마사지를 한다. 요즘은 씻지 못하고 잠들 때가 있을 정도로 바쁜 시절을 보내고 있어서, 얼굴과 몸에 우유를 문지르고 있는 시간이 사치스럽게 느껴지기도 하고, 모처럼 힐링이 되기도 한다.

목욕탕은 지은 지 오래 되었고 관리도 소홀해 그리 깨끗하지 않다. 거울에는 얼룩이 튀어있고, 플라스틱 세면도구들에도 기스가 나 있고 색이 바래져 있다. 운영하시는 분들이 모두 연세가 지긋하신 노인층이기 때문일까? 자꾸 새로 바꾸기보다 버리지 않고 버틴다. 열쇠를 주고 수건을 건네는 사람도 할머니, 세신사도 할머니, 표를 받고 음료를 내주는 관리인도 할머니다.

여탕 한구석에는 흡연실도 있다. 세신사 할머니들을 위한 공간일 수도 있고, 나이가 지긋한 여사장님이 흡연자일지도 모른다. 유난히 잔소리가 많으신 관리인 할머니가 주로 사용하는지도. 어쨌거나 손님을 위한 공간은 아니다. 흡연실이 있는 우리동네 여탕이 나는 왠지 마음에 든다. 그렇다면 여기가 선진적인 여성주의의 공간인가 하면 그렇지 않다. 나이가 서로 엇비슷하지만 사장님은 세신사 할머니들에게 반말을 하고, 세신사분들은 신분이 다른 높은 이를 대하듯 여사장님께 연신 굽신거린다.

관리인 할머니에 대해서 나는 할 말이 많다.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에 나오는 유바바를 닮은 이 할머니는 잔소리가 유독 심하다. 탕에서 나와서 사물함까지 가는 동안 몸에서 물을 떨어뜨리지 말라고 요구하기도 한다. 무서운 인상과 날카로운 목소리에 나도 모르게 어깨가 올라가고 온몸이 굳는다. 유바바 할머니는 기분이 나쁠 때는 열쇠 대신 현금을 가져오라며 큰소리를 친다. 유바바 할머니 말이 곧 법이다. 잔소리에 등이 떠밀려 탕 안에 들어간 뒤에 구석자리에 앉아 조용히 유바바를 욕한다. 내가 여기까지 와서 잔소리를 들어야 되나 한숨을 쉰다.

절반은 기분이 나쁘고, 절반은 통쾌하다. 요즘 돈을 내고 입장한 곳에서 자기 마음대로 소비자들에게 잔소리하는 사람을 만나는 건 쉽지 않은 일이기 때문이다. 마치 이 목욕탕이 현실과 다른 세계 같다. 소비자가 왕이라는 이 자본주의 세계의 법칙이 통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 목욕탕만이 혼자 나이를 먹지 않고, 세상의 흐름과 무관하게 살아남은 것 같다.

돈을 내고도 기죽은 채 묵묵히 때를 밀어야 하는 목욕탕, 할머니 말이 왕의 말인 이 목욕탕의 전근대적인 질서가 어쩐지 통쾌한 것은, 돈을 내고 서비스를 받는다는 개념이 우리 사회의 상식이 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목욕물을 데우고 때를 밀고 음료를 만들어주어 감사하는 마음은 전근대적인 것이 되고, 돈을 낸 만큼 서비스를 받는 게 당연한 소비자들의 왕국. 뭐든지 살 수 있으며 돈을 지불한 대가로 누군가의 노동을 당연하게 제공받을 자격이 있다는 소비자들의 당당함이 불편한 것은 왜일까? 우리가 연결되어 있고, 서로 도움을 주고 받으며 살아간다는 감각을 잃어버리게 하기 때문이 아닐까?

목욕탕에 다녀오면 유바바 할머니에게 들은 잔소리가 생각나, 내가 왜 돈을 내고 기분 나쁜 소리를 들어야 하지? 다른 데 가고 만다! 그래, 다신 가지 말자고 결심한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 그 생각은 사라지고, 제일 가까운 데가 거긴데 그냥 씻고 오자. 또 잔소리를 하시면 흘려듣고 말지, 하며 다시 목욕탕을 찾는다. 내가 산 상품에 작은 흠집이 있으면 환불, 교환 되는 서비스 정신에 익숙해져서, 조금 마음에 안 드는 것을 참지 못하는 나 자신이 부끄러워지고 만다.

무슨 이야기를 하든 환하게 웃으며 듣고 친절히 답해야 하는 감정노동 종사자들의 미소가 안쓰러운 날에는 동네 목욕탕의 유바바 할머니를 떠올린다. 잔소리를 듣는 것은 여전히 싫지만, 유바바 할머니만은 끝내 친절해지지 말았으면 좋겠다.

/최정화 소설가

<※외부인사의 글은 경인일보의 편집방향과 다를 수도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