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방 관리들 부패 폭로하는 희극

19세기 러시아 이야기 현재 닮아

극을 보는 시선으로 사회 본다면

지위로 ‘사람 평가’ 벗어날 수도

권순대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
권순대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

연극 ‘감찰관’(니콜라이 고골 작, 임도완 각색·연출, 4월29일~5월5일, 아르코예술극장 대극장)은 지방 관리들의 부패와 허위를 적나라하게 폭로하는 희극이다. 19세기 러시아가 그 배경이다. 연극은 “감찰관이 온다고 합니다”로 시작한다. 감찰관이 온다는 소식 앞에서 시장은 우체국장, 병원장, 교육감, 그리고 판사까지 동원하여 대책을 마련하느라 분주하다. 감찰관이 오기도 전에 이미 도착해 있는 형국이다.

주인공인 홀레스타코프는 감찰관이라고 사칭하지 않았다. 정확하게는 먼저 사칭하지 않았다. 자신을 감찰관으로 착각하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고 빈털터리 신세였던 그는 감찰관 흉내를 내기로 한다. 대접이 달라진다. 이제 흉내를 넘어 본격적으로 사칭한다. 시장뿐 아니라 지방 관리들로부터 뇌물을 받아 챙긴다. 챙길 수 있는 만큼 챙긴다. 어쩌면 시장과 지방 관리들이 나서서 홀레스타코프를 가짜 감찰관으로 만든 셈인지도 모른다.

홀레스타코프는 시장의 딸과 약혼까지 한다. 시장은 감찰관인 사위 덕을 기대하면서 장군이 되리라는 꿈에 부풀어 있다. 하지만 이 모든 게 다 거짓이었다는 사실이 마침내 밝혀진다. 우편물을 검열하는 우체국장의 손에 홀레스타코프가 쓴 편지가 들려 있다. 지방 관리들이 돌아가면서 편지를 읽어가는 장면에서는 조롱과 풍자가 넘친다. 시장은 늙어빠진 말처럼 어리석고, 우체국장은 비열하고, 병원장은 모자 쓴 돼지이며, 교육감은 양파 냄새를 풍기고, 판사는 불한당이라고 편지에 적혀 있다.

역할 바꿔치기는 문학 작품에서 자주 다뤄지나 현실에서도 가끔 일어난다. 16세기 프랑스의 생활사를 기록한 ‘마르탱 게르의 귀향’(나탈리 제먼 데이비스)은 그 생생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법정 기록, 농촌의 관습과 사회 역사적 배경을 추적하면서 가짜 마르탱과 진짜 마르탱의 이야기를 남겼다. 이 이야기에서 중요한 세 명은 마르탱 게르, 그의 아내 베르트랑드, 그리고 아르노 뒤 틸이다. 마르탱 게르가 8년의 실종 끝에 고향에 돌아온다. 사실은 아르노가 마르탱으로 사칭을 한 것이다. 하지만 가짜 마르탱은 귀향 후 가족과 마을 공동체로부터 인정을 받는다. 재산을 둘러싼 싸움이 없었다면 법정에 서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놀랍게도 법정에서 일부는 아르노가 진짜 마르탱이라고 진술하고 일부는 가짜라고 증언한다. 최종 판결 직전 한 남자가 의족을 한 채 법정에 나타나 자신이 마르탱이라고 주장한다. 전쟁에서 다리 총상을 입은 진짜 마르탱이 나타나자 모든 사실이 밝혀진다. 아르노는 유죄 판결을 받고 처형된다.

‘마르탱 게르의 귀향’에서 데이비스는 이렇게 기록하였다. ‘다른 남자가 내가 남겨둔 삶을 살아왔고, 내 아버지의 상속자이고 내 아내의 남편이며 내 아들의 아버지라고 주장하고 있다면, 그렇다면 나는 누구인가라고 그는 자문했을 것이다. 진짜 마르탱은 너무 늦기 전에 자신의 정체, 자신의 자아를 되찾기 위해 돌아왔을 것이다’. 이 역할 바꿔치기는 기이하고 비극적인 이야기로 전해지고 있다. 미하일 바흐친이 말했듯 웃음은 전복의 미적 장치이다. 바흐친은 독재에 저항하는 힘을 웃음에서 찾았다. 민속적인 웃음이 기존 체제의 가치를 전복하는 미적 장치라고 본 것이다. 연극 ‘감찰관’에서 웃음은 권위를 무너뜨리는 방식으로 작동한다. 시장과 지방 관리들이 가짜 감찰관 앞에서 아첨과 과장된 행동을 보이면 보일수록 그들은 스스로가 속한 기존의 위계질서가 얼마나 기만에 찬 것인지를 폭로하는 셈이다.

연극 ‘감찰관’은 현재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가짜 감찰관의 역할 바꿔치기는 권력이 수용되는 과정과 그 과정에서 작동하는 집단의 공모 메커니즘을 드러내는 장치이다. 풍자와 조롱의 대상인 시장과 지방 관리들을 바라보는 그 시선으로 우리 사회를 볼 수 있다면 적어도 지위나 직함으로만 사람을 평가하는 일면적인 모습에서 벗어날 수 있지 않을까. 웃음 넘치는 마지막 장면에서 “뭘 보고 웃는 거요? 자기 자신을 보고 웃으세요!”라는 시장의 대사를 귀담아들어야 하는 사람들이 누구인지 우리는 잘 알고 있다.

/권순대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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