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해자 서사가 타자의 피해 가려

오늘날 이스라엘이 보여주는 현실

한국학은 단순한 성공담 아니어야

불편한 성찰의 능력 필요한 자세

옥창준 한국학중앙연구원·한국학대학원 정치학 조교수
옥창준 한국학중앙연구원·한국학대학원 정치학 조교수

모든 국가는 자기 자신에 관한 서사를 갖고 싶어 한다. 국가는 주권, 영토, 국민이라는 최소요건을 넘어서 서사라는 윤활유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말끔한 서사를 통해 자신이 어디에서 왔고, 무엇을 견뎠으며, 어떤 가치를 지켜왔는가를 대내적, 대외적으로 설득할 수 있다면 금상첨화일 것이다.

문제는 그 서사가 항상 맹점을 낳는다는 데 있다. 국가가 만들어낸 ‘우리’는 지나치게 무구(無垢)하다. 우리는 고통받았고, 저항했고, 결국 살아남았으며, 그렇기에 이 세상에서 정당한 자리를 가져야만 한다. 그러나 바로 그 무구함이 타자의 고통을 보지 못하게 하고, 자기 내부의 폭력과 모순을 설명 불가능한 것으로 만든다.

현대 이스라엘의 사례는 이를 잘 보여준다. 이스라엘은 홀로코스트의 기억과 유대인의 생존권이라는 강력한 서사 위에 세워졌다. 유대인이 다시는 학살과 추방의 대상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주장은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그러나 그 기억이 국가의 안전보장 논리와 결합해 절대화될 때,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추방, 점령, 봉쇄, 죽음은 부차적인 문제로 밀려난다. 오늘날 이스라엘의 현실은 피해자 서사가 어떻게 타자의 피해를 가리는 장치가 될 수 있는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서사가 강력할수록 맹점도 강력해지는 것이다.

그렇다면 한국의 서사는 어떨까. 식민지, 전쟁, 분단, 독재를 통과해 민주화와 경제성장을 이룬 서사는 한국 사회에 강한 자기 확신을 부여했다. 그러나 그 서사가 우리의 전부가 되는 순간, 우리는 스스로를 언제나 피해자, 저항자, 성취자로만 상상하게 된다. 한국의 무기 수출, 군사력 증강, 핵무장론, 이주민과 주변부에 대한 배제, 성장의 그늘에 대해서는 비판적 문제의식이 쉽게 들어서지 못한다. 우리는 무구하다고 믿기 때문이다.

다만 한국 사회에는 그 무구함을 의심하고 캐물었던 순간들이 있었다. 국가폭력을 폭로한 사람들, 반공의 이름으로 지워진 존재들을 복원하려 한 사람들, 성장과 민주주의의 그늘을 말한 대항 세력들이 있었다. 바로 그들이 한국의 서사를 ‘닫힌 성공담’으로만 두지 않았다.

바로 이 지점에서 서사를 고민하는 한국학의 과제가 중요해진다. 서사는 단순한 이야기의 형식이 아니라, 한국을 어떤 공동체로 이해하고 세계 속에서 어떤 위치에 놓을 것인가를 결정하는 인식의 틀이다. 따라서 한국학에서 서사를 묻는다는 것은 한국을 설명하는 방식 그 자체를 성찰하는 일이기도 하다.

오늘날 한국학은 더 이상 한국을 세계에 소개하는 학문에 머물 수 없다. 한국학이 단지 한국이 어떻게 성공했는가를 설명하는 학문이 된다면 그것은 한국인들이 이미 알고 있는 무구한 ‘우리’를 학문적으로 포장하는 데 그칠 위험이 있다.

따라서 한국학이 만들어가야 할 서사는 단순한 성공담이 아니어야 한다. 식민지 피해의 기억을 말하되, 그 기억이 다른 아시아와 세계의 고통을 보지 못하게 만든 순간들을 함께 물어야 한다. 우리의 서사가 보지 못하는 맹점을 계속 찾아내야 한다. 분단과 전쟁의 상처를 말하되, 반공국가의 이름으로 지워진 삶을 기억해야 한다. 민주화의 성취를 말하되, 민주주의가 국가적 오만으로 굳어지는 위험을 경계해야 한다. 경제성장과 문화적 부상의 서사를 말하되, 그 이면의 노동·지역·젠더·이주·주변부의 문제를 함께 읽어야 한다.

결국 한국학은 한국을 더 빛나 보이게 하는 학문이 아니라, 한국을 더 깊고 불편하게 읽게 하는 학문이어야 한다. 피해의 기억을 간직하되, 피해의 기억이 타자의 고통을 지우지 않도록 하고, 저항의 역사가 새로운 배제를 정당화하지 않도록 하며, 성공의 경험이 자기 확신과 오만으로 굳어지지 않도록 하는 것.

바로 그 불편한 성찰의 능력이야말로 오늘날 한국학에 필요한 자세일 것이다. 반면교사는 수두룩하지만, ‘정면교사’는 많지 않은 고독한 길이다.

/옥창준 한국학중앙연구원·한국학대학원 정치학 조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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