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해도서 광천으로 피난 장사

하반신 불구 딸과 새우젓 팔아

“자식 먹을 걸 남겨주려고…”

그늘한 점 없는 모습, 父 덕분

김예옥 출판인
김예옥 출판인

너무 웃긴 얘기지만 나는 오래 전, 출판사의 종잣돈을 마련하려고 새우젓 장사를 한 적이 있다. 그걸 했다고 해야 하나? 솔직히 말하면 한 달가량 새우젓 몇 통을 팔았을 뿐이다. 숫기가 없고 자의식에 차 있던 내가 팔을 걷어붙이고 장사를 한다는 건 애초부터 어울리지 않는 일이었다. 점포도 없이 막연하게 시작한 ‘오뉴월 땡볕’은 내가 소꿉장난처럼 조몰락거리다 곧바로 문을 닫은 가게 상호였다.

나는 왜 하필이면 새우젓을 팔려 했을까?

30여 년 전 초가을, 시골에 내려갔더니 엄마가 광천(독배 새우젓으로 유명한 충남 홍성에 있는 읍)으로 새우젓을 사러 가자고 하셨다. 독배가 어디인지 몰라서 두리번거리는데 마침 자전거를 타고 지나가는 노인이 있었다. 노인은 “우리집 가게가 거기 있어요”하면서 따라오라고 했다. 가게 이름이 ‘옹진상회’였다. 내가 ‘황해도 옹진’이냐고 물었더니 그렇단다.

바닷가였던 옹진에서 어렸을 때부터 굴을 까고 배를 타기도 했던 노인(김원진, 1924~2013)은 1·4 후퇴 때 가족과 함께 내려와 광천에 정착했다. 1960~70년대 배 한 척만 있어도 부자로 통하던 시절, 배를 부리던 선주였고, ‘물 반 고기 반’이던 연평도와 덕적도에서는 새우와 조기를 잡던 어부였다. 강한 황해도 사투리를 쓰는 노인은 하얀 피부에 얼굴이 훤했고 성격도 시원시원했으며 옳고 그름이 분명했다. 한마디로 양심이 있는 분이었다.

노인은 새우젓을 더 달라고 실랑이를 벌이는 엄마에게 “아주마이, 왜 그래요?”하면서 목소리를 높였지만 늘 우리의 예상보다 더 많은 새우젓을 담아주었다. 당연히 우리는 그 가게의 단골이 되었고 엄마와 나는 김장철뿐 아니라 보통 때도 심심치 않게 들러 새우젓도 사고 얘기도 나누었다.(노인의 가게는 광천에서 제일 붐볐다.)

가게에는 노인의 딸(김세화, 1960~)도 함께 있었다. 노인이 큰 드럼통에서 새우젓을 덜어 작은 통에 담으면 딸은 마루에 차려진 계산대에서 새우젓을 포장하고 돈을 받았다. 늘 웃는 얼굴에 야무진 인상의 딸은 때로 ‘서울깍쟁이’ 같았다. 아버지가 손님들에게 인심을 쓴다 싶으면 딸은 생글생글 웃으면서 바로 제동을 걸어 덤을 못 주게 했다.

문제는 그 딸이 하반신을 전혀 못 쓰는 불구였다는 사실이다. 몸을 뭉개면서 움직이는 딸을 보면서 손님들마다 ‘저렇게 예쁜 처녀가 멀쩡했더라면’하는 안쓰러움을 느꼈을 것이다. 노인 역시 “우리 딸 먹을 걸 남겨주려고…”하면서 자신이 장사하는 이유를 설명했다. 다른 자식들에게는 “내가 남기는 돈은 건드리지 말아라. 얘 먹고 살아야 한다”고 했단다.

며칠 전 그 딸에게 전화를 걸었다. 처음으로 나는 왜 하반신을 못 쓰게 됐는지 이유를 물었다. “제가 대여섯 살까지는 걸어 다녔겠죠? 그런데 어느 날 고열에 시달린 후 다리에 힘이 빠지면서 걸을 수가 없었어요. 지금도 열이 펄펄 나며 앓던 그때가 다 기억나요. 그래도 어떻게 목발을 짚고 다니기는 했어요. 그런데 일곱 살 때 친척 남동생이 돌을 던졌는데 하필이면 제 다리에 맞아서 다리가 부러졌어요. 그때부터 완전히 못 걷게 된 거예요.”

나는 그럼에도 성격이 그렇게 밝을 수 있는지 물었다. “생활하면서 불편하다고 느낀 적이 별로 없었어요. 신세 한탄을 한 적도 없고요. 저는 그냥 사는 거라고 생각했어요.” 나는 그래도 못내 아쉬운 게 있을 게 아니냐고 했다. “학교를 못 다닌 거요. 대학생활을 하면서 낭만을 느껴봤으면 좋겠다고 동생한테 말한 적이 있어요. 20대로 돌아가 정상의 몸이라면 국문과에 들어가서 글 쓰는 사람이 됐을 거예요.”

나는 그늘 한 점 없는 딸을 만든 건 팔할(八割)이 노인이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제가 경제력도 없고 가게도 없었다면 우울했겠죠.”

아, ‘오뉴월 땡볕’이란 오젓·육젓이 나오는 시절의 이글거리는 태양을 떠올리며 지은 것이다. 작명만은 괜찮지 않은가!

/김예옥 출판인

<※외부인사의 글은 경인일보의 편집방향과 다를 수도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