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마. 경기옛길과 근대문화유산

 

구리·남양주·양평… 130㎞ 이어진 평해길

정약용·이덕형·여운형 등 역사적 인물 흔적

1956년 중앙선 간이역으로 문을 연 ‘능내역’

폐역 후 레일바이크·카페 들어서 향수 자극

영화 건축학개론·BTS 뮤비로 유명한 ‘구둔역’

대일항쟁 건축 양식 반영 ‘국가등록유산’ 지정

그래픽/박성현기자 pssh0911@kyeongin.com/제미나이AI이미지 재가공
그래픽/박성현기자 pssh0911@kyeongin.com/제미나이AI이미지 재가공

길엔 연결에 대한 갈망이 묻어있다. 다른 존재, 다른 공간, 다른 세계와 닿고 싶은 사회적 동물의 본성이 아주 오래 전부터 길을 만들어냈다. 그래서 길에는 희로애락이 담겨 있다. 한때 수없이 많은 발자국이 찍혔을, 그러나 지금은 풀만 무성한 옛길이 어딘가 아련함을 주는 이유이기도 하다. 사람들이 옛길을 훑는 것도, 더 이상 기적 소리가 들리지 않는 기찻길이 추억의 명소가 되는 것도 맞닿아 있을 터다.

■ 푸르름 어우러진 휴식의 길

능내역과 수백미터 떨어진 곳에 위치한 ‘경기옛길’ 평해길 제3길 ‘정약용길’의 시작점. 인증 스탬프를 찍을 수 있는 공간이 있다. 2026.5.24 /강기정기자 kanggj@kyeongin.com
능내역과 수백미터 떨어진 곳에 위치한 ‘경기옛길’ 평해길 제3길 ‘정약용길’의 시작점. 인증 스탬프를 찍을 수 있는 공간이 있다. 2026.5.24 /강기정기자 kanggj@kyeongin.com

경기도는 그 옛날 선조들이 걸었던 길을 재현해 7개의 ‘경기 옛길’로 되살렸다. 평해길은 이 경기 옛길 중 하나다. 총 길이만 130㎞. 7개의 옛길 중 봉화길(135㎞) 다음으로 길다. 서울에서 구리, 남양주를 지나 양평, 그리고 강원도로 이어진다. 산과 강이 어우러진 풍경을 벗삼아 걸을 수 있는 곳이 많아, 두물머리나 세미원처럼 이미 명소가 된 곳들이 길 군데군데 자리한다. 지난 24일 평해길 일대를 찾았을 때, 한강의 정취를 느끼며 자전거를 타는 이들이 쉴 틈 없이 이어졌다.

다산 정약용, 한음 이덕형, 몽양 여운형 등 역사적 인물들의 흔적도 평해길 곳곳에서 만날 수 있다. 정약용의 출생지인 남양주시 능내리 일대에 뻗은 평해길 제3길은 아예 ‘정약용길’로 명명돼있기도 하다. 그만큼 평해길과 닿은 문화유적들이 적지 않다. 만해 한용운 등이 잠들어 있는 망우역사공원, 대일항쟁기 의병운동의 시발점 격이었던 지평 의병과 힌국전쟁 당시 격전 중 하나였던 지평리 전투를 기리기 위한 지평의병·지평리전투기념관 등 근대문화유산들도 만날 수 있다.

현재 능내역의 모습. 2026.5.24 /강기정기자 kanggj@kyeongin.com
현재 능내역의 모습. 2026.5.24 /강기정기자 kanggj@kyeongin.com

■ 그 옛날 향수의 공간, 능내역

서울에서 구리, 남양주, 양평으로 이어지는 평해길 일대엔 문 닫힌 기차역들이 있다. 마찬가지로 서울에서 구리, 남양주, 양평으로 뻗는 철도인 중앙선의 기차역들이다. 지금은 파주 임진각역에서 양평 지평역까지 경기 동·서를 잇는 경의중앙선으로 운행되고 있지만, 시작점은 침탈을 위해 일제가 서울 청량리부터 경북지역까지 개설했던 중앙선이었다.

1945년 광복 이후 중앙선은 한동안 단선 철도로 운행됐지만, 도시가 변화하며 철도는 하나둘 단절됐다. 2000년대 들어선 기차 대신 전철 운행이 가속화됐다. 쓸모를 다한 기차역은 하나둘 문을 걸어 잠갔다.

경기옛길 평해길 3구간 정약용길. /두루누비 캡처
경기옛길 평해길 3구간 정약용길. /두루누비 캡처

남양주 능내리에 있는 능내역은 이 중앙선 ‘폐역’ 중 하나다. 평해길 제3길인 ‘정약용길’의 시작점에서 수백 미터 떨어진 곳에 있다. 도로변에 바로 위치하지 않아 무심코 지나치기 쉽지만, 짧은 골목 끝에 ‘능내역’이라고 적힌 오래된 간판 하나가 눈에 들어온다. 1956년 간이역으로 시작해 2008년 해당 구간에 전철이 들어서면서 인근에 이를 위한 운길산역이 영업을 시작하자 문을 닫았다. 목재 창틀에 기와 지붕. 역사라기 보다는 가옥이라고 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아담했다. 역 앞쪽엔 한때 기차가 오갔을 철로가 놓여있었다. 풀이 잔뜩 자란 기찻길 옆엔 ‘위험한 철길로 다니지 맙시다’라는 경고 문구가 붙어 있어, 완행 열차가 다녔을 그 옛날 풍경을 그리게 했다.

폐역이 된 후 능내역은 한동안 시민들의 향수를 자극하는 공간으로, 또 휴식을 위한 곳으로 사용됐었다. 지난 24일 능내역을 찾았을 때는 문이 굳게 닫힌 채 ‘접근 금지’ 줄이 쳐져 있었지만 곳곳에서 그 흔적을 발견할 수 있었다. 관람객들의 사진을 찍어 능내역 내부에 걸어놓고 역사 곳곳을 포토존으로 꾸미기도 했었는데, 이날 닫힌 문 앞에 누군가의 추억이 담긴 액자 몇 개가 비스듬히 놓인 채였다. ‘첫눈 오는 날 여기서 만날까’ 등의 감성적인 문장들도 벽에 적혀있었다. 레일바이크가 운행되고 열차 카페가 영업했던 적도 있었지만 이날 능내역엔 다른 존재, 다른 세계와 닿기 위해 설레고 그리워하며 기차를 기다리던 그 때 그 시절의 모습만 자리하고 있었다.

■ 관광 명소가 된 근대문화유산

대일항쟁기 건축 양식이 반영된 구둔역 모습. /경인일보DB
대일항쟁기 건축 양식이 반영된 구둔역 모습. /경인일보DB

구둔역은 평해길 제9길의 시작점이기도 하다. 양평 일신리에 소재한 구둔역은 중앙선의 한 역으로서 1940년 문을 열었다. 마찬가지로 중앙선이 복선 전철화되면서 2012년 폐역이 됐다. 대일항쟁기 철도 역사 건축 양식을 잘 반영한 곳으로 평가받는다. 1940년 지어졌을 당시의 모습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데다 건물 안 주요 자재들도 원래의 것들이 남아있는 게 특징이다. 이에 역사는 물론 광장과 철로, 승강장 등까지 지난 2006년 국가등록문화유산으로 지정되기도 했다. 마치 책을 엎어놓은 듯 삼각형의 지붕이 인상적이다. 대합실 입구에 비나 햇빛을 가리는 지붕을 설치하고 기차를 기다리는 이들이 역무실 안에서도 오고 가는 기차를 쉽게 볼 수 있도록 3면에 창문을 다는 등, 이용객들의 편의를 높이기 위한 요소들도 눈에 띈다.

역사가 주변 경관과 잘 어우러져 아름답고 특유의 고즈넉함이 매력 요인으로 꼽힌다. 대중들에게 명성이 알려진 것은 2012년에 개봉한 영화 ‘건축학개론’에 등장하면서다. BTS의 뮤직비디오를 통해 조명되며 지역을 대표하는 관광지로 거듭나기도 했다.

밤에는 은하수와 반딧불이를 볼 수 있는 곳으로도 명성을 높이는 추세다. 별이 쏟아지고, 반딧불로 수놓아진 밤하늘을 담고 싶은 사진가들에게 인기를 끈 장소이기도 했다. 시간이 멈춰선 듯한 그 옛날 철로와 역사, 그 사이로 발하는 빛들이 어우러져 색다른 감성을 가져다준다는 평이다.

옛길은 끊기고 기차도 멈춰 그 흔적이 차츰 희미해져가지만, 연결을 갈망하는 마음은 그대로 남아 다른 시간과 닿기 위해 그 공간에 머무르고 있다. 옛길, 그리고 그 길과 닿은 문화유적들이 풀로 뒤덮이지 않은 채 그 의미를 이어가는 까닭이다.

/강기정기자 kanggj@kyeongi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