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의 노동운동을 이야기할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데가 동일방직이다. 그야말로 경제력과 정치 권력이 한통속으로 돌아가던 1970년대 후반, 노동력을 착취당하던 동일방직 여공들이 더이상 견딜 수 없다면서 들고일어섰다. 다음 달이면 행정구역 명칭이 제물포구로 바뀔 인천 동구의 당시 동일방직 주변에는 기계공장, 유리공장을 비롯한 대규모 공장이 빼곡했다. 그 동일방직이 잠시나마 삼성의 품안에 있었던 적이 있다.

삼성그룹 창업주 이병철 회장은 1954년 제일모직을 세우고 국내 최초로 양복 원단 국산화를 실현했다. 이 회장은 4년 뒤에는 장미라사라는 이름의 제일모직 직매장도 설립했는데, 그 같은 날에 인천의 대형 직물 공장 동일방직을 인수했다. 삼성과 동일방직과의 인연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어떤 이유에서인지 삼성은 1년 만에 동일방직을 다시 양도했다.

삼성이 인수했다가 다시 넘긴 지 꼭 20년이 지났을 때 열악한 환경을 참다 못한 동일방직 여공들이 노동조합이란 이름 아래 모여들었다. 그 당시 동일방직 여공의 노동 환경은 소설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에 세밀하게 그려진다. 점심 시간 15분, 실내 온도 39℃, 작업장 소음 90㏈. 요즘 같으면 말도 안 되는 노동 환경이다.

이렇게 일하는 소설 속 3남매의 월 수입 총액은 8만231원. 여기에서 보험료, 국민저축, 노동조합비, 식비 등을 제하고 3남매가 어머니에게 드리는 돈은 총 6만2천351원이었다. 네 식구가 한 달에 쓰는 비용은 방세가 1만5천 원으로 제일 많았고 정부미 쌀값이 6천100원으로 그다음이고, 반찬과 약값도 꽤 차지했다. 그 가운데서도 앞집 아이가 교통사고를 당해 문병비로 230원을, 아들 직장 동료 퇴직 송별비로 500원을, 길 잃은 할머니에게 140원을, 불우이웃돕기에 150원을 썼다.

삼성전자에서 6억원 성과급을 받게 되는 직원이 무더기로 생겨나자 이를 둘러싼 논란이 뜨겁다. 삼성 내부의 노노갈등은 물론이고 다른 대기업으로 노조의 성과급 요구가 번지고 있다. 국민적 시선도 곱지 않다. 노동자의 임금 개념마저 바뀔 공산이 커졌다. 50년 전, 쥐꼬리만한 가족 생활비에서 길 잃은 할머니에게 다만 얼마라도 선뜻 내놓을 줄 알았던 그 따뜻함이 연봉보다도 몇 배나 많은 성과급을 받는 지금의 직장인에게도 옮아갔으면 좋겠다.

/정진오 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