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 만행에 일어선 한 소년… 100년 동안 잊혔던 애국지사 [이원규 작가가 쓴 임영균 약전·(1)]
입력 2026-06-03 21:54수정 2026-06-08 14:07
지면 아이콘지면ⓘ2026-06-04 1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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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가 철시 투쟁 벌이고 체포된 나이 만 14세
연극단체·첫 조선인 치과병원 연 저명인사
유족, 개명 전 이름 알았으나 투사인지 몰라
이름 바꾸며 살아야했던 생애, 근현대 기억
임갑득 지사의 영화학교 학적부. /아벨서점 자료
■ 임갑득에서 개명, 100년 만에 알려져
임갑득(林甲得·1904~1966) 지사는 100년 동안 잃어버렸던 소년독립투사이다. 3·1운동 때 인천의 상가 철시(撤市) 투쟁을 펼치고 경찰에 체포되었다. 서대문감옥에 수감되고 다음해 2월 가출옥했다. 만 14세 8개월에 체포됐으니 3·1운동으로 실형을 선고받은 독립투사 4천239명 중 최연소였을 듯하다.
가출옥 이후의 행적이 오랫동안 알려지지 않았다. 경인기차통학생회 문예부와 연극단체 칠면구락부를 이끌었고, 인천 첫 조선인 치과병원을 열고 언론사를 경영하고, 사회봉사로써 중망(衆望)을 받은 인물 임영균(林榮均)이 그가 개명한 이름이었음이 최근에야 밝혀졌다.
긴 세월 동안 국가보훈부도 알지 못했다. 연구자들과 언론매체들은 소년 독립투사 임갑득의 행적을 몰라 안타까워하는 글을 쓰고 기사로 실었다. 유일하게 경인일보사가 ‘인천인물 100인’(2007년 7월25일자 9면 보도, 다인아트에서 2009년 단행본 발간)에서 저명인사 임영균을 기술하며 ‘어릴 적 이름이 갑득이었다’라는 유족의 말을 인용했으나 그만 무심히 넘어갔다. 유족들도 그가 독립투사였음을 몰랐던 것이다. 필자도 2023년 고유섭(高裕燮)의 평전을 집필하며 그의 가까운 벗이었던 임영균을 서술했으나 소년시절에 임갑득 이름으로 투쟁했다고 쓰지 못했다.
1927년에 임영균으로 개명했음을 확인한 뒤 자료를 찾아보니 놀랍게도 그보다 앞서 임균영(林均榮)으로 개명했었고, 그 이름으로 제물포청년회와 이우(以友)구락부 등에서 민족운동을 펼쳤음이 드러났다. 민족의식이 뚜렷했던 단체들이다. 임갑득에서 임균영, 다시 임영균으로 이름을 바꾸며 살아야 했던 그의 생애에 민족운동사와 인천 근·현대사의 영욕이 고스란히 들어 있다. 이제 인천시사(市史)는 물론 한국독립운동사, 국가보훈부 기록도 고쳐야 한다.
내리교회 설립 영화학교 우등생으로 졸업
입학 전 의성사숙에서 한문·서예 배운 듯
부친 임용환 ‘승정원 일기’ 고종 알현 기록
계몽단체 대한협회보 등 인천서 많은 활동
■ 퇴역 무관의 아들로 인천에서 출생
제적등본과 손자 임상호(林相浩·68) 씨 증언에 의하면 임갑득 지사는 1904년 8월3일, 원인천 지역(현 미추홀구 관교동과 문학동)에서 부친 충주임씨 임용환(林鏞煥)과 모친 경주이씨 사이에서 출생했다. 선조들의 본향은 충청북도 충주 달천(達川)이다. 조부가 한성(서울)으로 이주했고, 부친이 인천으로 옮겨 왔다고 한다.
뒷날 임영균과 깊이 교유한 고일(高逸·1903~1975)은 임영균의 부친 임용환에 대해 흥미로운 기록을 남겼다.
“우리 인천에서 처음 책 장수를 벌리고 세책(貰冊)을 논 사람은 임만호(林萬戶)씨다. 만호는 이름이 아니고 벼슬 이름이니 시방 치면 소위(少尉)급 군인이나 되는지? 이분은 ‘주간인천’ 사장인 임영균씨의 선친이다. (중략) 흘림 언문(한글)으로 써서 기름을 먹여서 만든 소설책이 많았었다. ‘삼국지’ ‘유충열전’ ‘옥루몽’ ‘수호지’ 따위나 ‘치악산’ ‘춘향전’ ‘심청전’ 따위인데 하루에 동전 한 푼의 셋돈을 내고 보던 대본(貸本)이 가장 많이 나갔다.” (‘인천석금’, 주간인천사, 1955, 119쪽)
임용환 만호가 고종황제를 알현한 기록이 실린 ‘승정원일기’. 제4행에 ‘지세포 만호 임용환’이 보인다. /한국학중앙연구원 자료
임갑득의 부친 임용환이 ‘임만호’로 불렸음을 알 수 있다. ‘승정원일기’에 1893년 7월 28일, 그가 남해 거제도 지세포(知世浦)의 만호(萬戶)로 임명된 기록, 다음날 고종황제를 알현한 기록이 있다. 지세포는 지세포진과 산성이 있고 임진왜란 때도 전략의 요충이던 곳, 조선통신사(朝鮮通信使) 사절단이 출발하고 도착했던 곳이고, 만호는 그곳 수비 책임자, 오늘날 해군 소령, 중령쯤 되는 종4품의 무관이었다. 무관들이 가기 싫어하는 직책이라 임기가 9개월이었다.
지세포 관련 ‘승정원일기’의 다음 기록은 1894년 7월9일 ‘새로 임명된 지세포 만호 김창정(金昌鼎)이 75세 노령이라 멀리 떠나 임무를 수행하기 어려워 사양한다’라고 병조판서가 조정에 보고한 내용이다. 임용환이 임기를 마치고 달포가 지나도록 임무 교대를 못했음을 알 수 있다.
‘대한자강회월보’에 실린 인천 회원 명부의 임용환. /한국근대자료DB
임용환이 인천에서 활동한 기록이 많다. 1907년 ‘대한자강회월보’ 제12호에 실린 인천지회 회원 명단에 이름이 있고, 인천항 포목전(布木廛) 명부에도 올라있다. 1908년 3월31일 발행 ‘황성신문’을 보면 사립 인명(仁明)학교에 형 임영환(林英煥)과 각각 20원이라는 큰돈을 기부했다. 임영환은 애국 계몽단체인 대한협회 기관지 ‘대한협회보’ 인천 배포처에도 이름이 올라있다.
무관이었던 임용환은 1907년 군대해산 이전 퇴역해 인천으로 온 것이다. 포목전을 열었으나 자국 은행의 지원을 받은 일본 상인들의 자본력에 밀려 실패하고, ‘육전소설’, ‘딱지본’이라 불린 고소설과 신소설을 빌려주는 일로 먹고살며 애국 계몽운동을 펼쳤음을 알 수 있다.
■ 영민했던 소년시절
1919년 영화학교 학생들의 아령체조 장면. /이성진 선생 소장
임갑득은 내리교회가 설립한 영화학교에 다녔다. 임갑득과 임영균이 같은 인물이라는 실마리는 지난 2월 인천 아벨서점 곽현숙 대표와 기독교사 연구자 이성진 선생이 영화학교 학적부에서 발견하였다. 학적부를 보면 임갑득은 열한 살이던 1915년 9월 입학해 1917년 봄에 중퇴했다. 1학년과 4학년 기록은 없다. 전 과목이 출중하여 ‘일최(一最)’라고 했다. 월반(越班) 입학, 월반 졸업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입학 전 교육’란에 ‘사숙(私塾)’이라는 기록이 보인다. 김병훈(金炳勳)의 의성사숙(意誠私淑)임이 거의 확실하다. 이 사숙 출신인 고일은 ‘인천석금’에서, 의성사숙이 ‘금곡동 창영학교 예전 정문 현재의 강당 서편 쪽에 있었다’라고 썼다. 고일과 고유섭이 그랬듯이 임갑득도 학교 입학 전에 의성사숙에서 한문과 서예 등을 배웠을 것으로 추정된다.
1919년 영화학교 학생들의 교실수업 장면. /이성진 선생 소장
이성진 선생 소장 1919년 ‘영화학교 사진첩’의 교직원 명단에 학감 겸 교사 이범진(李汎鎭)이 있다. 그는 구한국 무관으로서 인천에 낙향한 이기웅(李基熊)의 아들이다. 영화학교 출신으로 내리교회의 의법(懿法)청년회와 이우(以友)구락부의 중심 멤버로도 활동했다. 뒷날 동아일보 인천지사 기자와 지국장을 지냈고 신간회(新幹會) 인천지회를 이끄는 등 민족운동을 펼쳤다. 이기웅이 임용환의 군대 시절 상급자여서 교유했고, 그래서 임갑득이 영화학교로 갔고, 이범진이 각별히 품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뒷날 임갑득은 ‘임균영’ 이름으로 의법청년회와 이우구락부 토론회에 나간다.
임갑득은 1918년 5월5일, 큰아버지 임영환의 양자로 입적되었다. 호적만 옮겼지 큰아버지 집으로 가지 않고 우각리(牛角里·현 동구 창영동) 친아버지 집에서 계속 살았다고 한다.
임영균 지사의 ‘나의 경인통학기’가 실린 ‘주간인천’ 지면. /조우성 전 인천시립박물관장 기증, 아벨서점 전시관 자료
뒷날 임영균은 자신이 창간한 신문 ‘주간인천’에 ‘나의 경인통학기’(1954년 9월 27일)를 기고했다. “서울의 K중학교에 다니다가 눈병으로 학업을 중단했고, 완쾌될 무렵인 다음해 3월에 기미년 운동 사건에 가담해서 1년 복역 출옥 후 눈병이 재발해 또 1년쯤 휴양하는 등 해서 약 2년의 공백이 생겼다”라고 했다.
그는 YMCA 중학부를 졸업한 것으로 알려져 왔다. K 이니셜이 통하는 한성의 학교로는 경성고보와 사립 경신고보가 있었다. 경신은 3·1운동 투옥자도 복교가 가능했다. 임갑득은 영민한 수재였으므로 최고 명문 경성고보에 다녔고, 3·1운동 투옥 전력 때문에 복교 길이 막혀 YMCA 중학부로 간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