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스로’ 의심하고 판단·인식하는 주체
좋은 사유란 질문 속 숨은 방향 알아채기
인공지능 시대 중요한 건 메타인지 능력
생각하는 존재로서의 인간, 호모 사피엔스는 인간의 오랜 정의이다. 그래서 데카르트의 ‘코기토(Cogito)’를 근대적 주체의 탄생을 알리는 선언처럼 받아들였다. 인간은 ‘스스로’ 의심하고 판단하고 인식하는 사유의 주체이므로 ‘존재한다’는 확실한 근거였다. 현대철학은 데카르트식 주체, 곧 스스로를 완전히 인식하고 통제하는 투명한 주체에 의문을 제기했다. 인간의 사유는 고립된 정신의 자율적 작용이 아니라, 언어와 권력, 욕망과 무의식, 사회적 조건 속에서 형성된다는 것이다.
인공지능의 시대에 인간의 사유에 의문은 더 근본적 방식으로 제기된다. 인공지능도 글을 쓰고, 이미지를 만들고, 논리를 구성하고, 질문에 답하지 않는가? 데이터와 알고리즘이 만들어내는 확률 계산의 결과라 해도 지적 수행의 차원에서 보면, AI는 이미 인간의 능력 일부를 대체하거나 능가하고 있다. 사유가 인간의 전유물이 아니라면, 인간다움은 어디에서 다시 찾아야 하는가? 질문하는 능력, 더 정확히 말하면 질문하고 질문을 검증한 능력이 아닐까?
사유란 질문과 답으로 이뤄지지만 답보다 질문이 중요하다. 질문 속에는 이미 전제와 관점과 욕망이 숨어 있다. 어떤 질문은 답을 열지만, 어떤 질문은 답을 가둔다. 좋은 사유란 정답을 빨리 찾아내는 능력이 아니라, 질문 속에 숨어 있는 답의 방향을 알아차리고 필요하다면 질문 자체를 다시 검증하는 능력이다.
지난달부터 학고재에서 이종구 작가의 개인전 ‘사유 思惟’가 열리고 있어 사유에 대한 미술적 표현을 살펴볼 기회가 되었다. 전시된 작품들은 한국 불교미술의 기념비적 작품인 반가사유상과 현실을 대조하는 형식으로 구성했다. 반가사유상의 주인공인 작가의 자화상이나 병든 몸, 강물이나 불꽃, 전쟁터를 마주 바라보는 듯한 구도이다.
두 폭 화면은 바로 간극과 차이를 드러낸다. 두 개의 캔버스는 붙어 있지만, 그 사이에는 보이지 않는 틈이 있다. 작가는 고통과 평화, 중생과 부처, 현실과 초월을 쉽게 화해시키지 않는다. 오히려 그 모순을 괄호 속에 넣어둔다. 불가에서 말하는 ‘불이(不二)’의 사유법이 그 간극을 메꾸는 열쇠가 될 수 있을까. 불이(不二) 란 둘이 아니라는 것이지 하나라는 뜻도 아니다. 그러므로 불이는 차이를 지워버리는 답이 아니라, 차이를 어떻게 넘어설 것인가를 묻게 하는 질문의 형식이다.
인공지능의 시대에 반가사유상의 고뇌 같은 깊은 사유가 절실하다. AI 사용법을 배워야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메타(meta) 인지 능력’이다. 내가 무엇을 알고 무엇을 모르는지, 내가 어떤 전제로 묻고 있는지, AI가 내놓은 답이 나의 질문에 갇힌 답은 아닌지 점검하는 능력이다. 공자는 “아는 것을 안다고 하고,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하는 것, 이것이 아는 것”이라고 했다. 소크라테스는 지혜란 자신의 무지를 아는 데서 시작된다고 했듯이 말이다.
메타인지는 프롬프트 작성 매뉴얼로 환원될 수 없다. 메타인지 능력은 암기식 학습으로도 길러지지 않는다. 토론과 글쓰기, 예술 감상과 비판적 읽기, 토론 같은 ‘다른 사유’와의 만남 속에서 자란다. 메타인지는 자기 생각을 다시 생각하는 능력이다. 내가 무엇을 알고 무엇을 모르는지, 내가 어떤 전제 위에서 묻고 있는지, 내가 얻은 답이 충분한지 스스로 점검하는 성찰적 힘이 중요해졌다. 국가와 지방 정부는 국민들의 메타인지 능력 함양을 위한 교육 혁신을 촉진하고 문화 사회 구현 계획을 세우고 여기에 집중적으로 투자해야 한다.
인공지능 시대의 인간은 질문하는 존재, “나는 묻는다. 그리고 내가 묻는 방식을 다시 묻는 ‘질문인’이다.” 깊은 사유란 답을 향한 질주가 아니다. 질문 앞에서 멈추고, 주저하고, 그 질문이 서 있는 자리를 살피는 일이겠다. 이제 인간은 호모 사피엔스, 곧 생각하는 존재에 머물 수 없다. 인공지능과 공진화해야 할 인간은 질문하고, 자신의 질문을 다시 성찰하는 인간, ‘호모 콰에렌스(Homo quaerens)’로 다시 태어나야 한다.
/김창수 인하대 초빙교수·객원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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