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몽과 현실 사이… 열다섯을 살았다

 

상가 문닫고 일제에 저항하자는 메시지

‘철시’ 통첩문 점포에 투입하다가 체포

인천경찰서 심문받고 1년 가까이 투옥

‘독립신문’ 애국지사들 속 이름 기록돼

임갑득 지사의 ‘감시대상인물카드’.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임갑득 지사의 ‘감시대상인물카드’.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 3·1 운동 철시 투쟁, 서대문감옥에 갇혀

1919년 3월, 임갑득은 눈병 때문에 기차로 통학하던 학교를 쉬며 객주조합 급사로 일하고 있었다. 대한독립 만세 함성은 인천에서도 크게 울렸으나 헌병 경찰의 무자비한 탄압으로 꺾였다. 3월 26일과 27일, 내리(현 중구 내동)의 잡화상 18세 청년 김삼수(金三壽)는 상가 철시(撤市)로 일제에 저항하자는 격문을 여러 전신주에 붙였다. 28일, 29일 문 닫은 점포가 늘어났다.

인천의 철시 투쟁을 보도한 ‘매일신보’ 기사.
인천의 철시 투쟁을 보도한 ‘매일신보’ 기사.

친일 매체 ‘매일신보’는 4월1일자 3면에 ‘소요(騷擾)사건의 후보(後報)’ 제목 아래 전국 상황을 알리며 인천 소식을 이렇게 전했다.

“적막한 인천항. 다시 철시하였다. 인천 시내는 그동안 평온한 듯하더니 다시 불온한 모양으로 변하며 수일 전에는 조선인의 상점이 얼마만 철시한 것을 보겠더니 삼십일부터 시내 각 조선인 상점은 모두 철시를 하고 인심이 흉흉한데 길거리에 행인의 자취도 없고 해변의 폭풍만 때때로 시가를 음습하여 쓸쓸하기가 한량 없다더라.”

인천경찰서장은 문 닫은 점포 주인들을 전부 불러 모아 다시는 철시하지 않겠다는 서약서를 받았다. 상인들은 4월1일 점포를 열었다. 14세 소년 임갑득이 김삼수의 철시 투쟁에 합세했다. 김삼수는 인천 기독교사에 보이는 인물, 뒷날 노동운동에 나선 자료가 있다. 임갑득과는 영화학교와 연결된 기독교 인맥으로 아는 사이였을 것이다.

4월3일, 임갑득은 김삼수와 더불어 철시하지 않으면 인천시가를 초토화하겠다는 ‘최후통첩문’을 점포들에 투입하다가 체포되었다. 인천경찰서에서 혹독한 심문을 받고 서대문감옥으로 끌려갔다. 경성지방법원의 예심과 1심, 복심법원의 2심, 고등법원 3심을 거쳐 징역 6월이 확정되고, 결국 1년 가까이 감옥에 갇혔다.

임갑득 지사와 3·1운동 투사들이 갇혀 신음한 옛 인천경찰서. 현 중구청 서쪽 만국공원(현 자유공원)으로 올라가는 길가에 있었다. /인천시립박물관 제공
임갑득 지사와 3·1운동 투사들이 갇혀 신음한 옛 인천경찰서. 현 중구청 서쪽 만국공원(현 자유공원)으로 올라가는 길가에 있었다. /인천시립박물관 제공

3·1운동 구속자들이 경찰서와 감옥에서 혹독한 고문을 당했음은 알려진 바이다. 임갑득의 신원을 기록한 일제의 감시대상인물카드를 보면 키가 157㎝이고 사진이 앳되어 보인다. 감옥에서 어떻게 견뎌냈는지 참 가련하다. 아버지 임용환은 아들을 잘 단속해 다시는 이런 일이 안 생기게 하겠다는, 위반하면 전 재산 몰수 등 어떤 처벌도 감수하겠다는 서약서를 쓰고 친척과 지인들의 연대 보증을 받았을 것이다. 감옥의 임갑득도 수십 번 반성문을 썼을 것이다. 감옥에서 살아서 나가려면 그럴 수밖에 없었으니까.

임갑득 출옥 소식은 상하이(上海) 발행 ‘독립신문’에 실렸다. 3·1 운동 투옥 애국지사들 속에 이름이 있다.

경성 종로 YMCA 중학부 기차통학

월남 이상재, 생도들 정신 무장 강조

10대 1 경쟁률 경성치과의학교 입학

‘고일’ 리더 경인통학생친목회 활동

임갑득 등 인천 3·1 운동 지사들의 투옥과 출옥을 알린 1920년 6월 5일 ‘독립신문’ 기사.
임갑득 등 인천 3·1 운동 지사들의 투옥과 출옥을 알린 1920년 6월 5일 ‘독립신문’ 기사.

■ 태형 90대 맞고 가출옥

임갑득은 가출옥할 때 참혹한 일을 겪었다. 절친한 벗 고일이 기록을 남겼다.

기미년에 서대문감옥에 투옥되었다가 볼기(笞刑) 90대를 맞고 나왔다. 어린 갑득이는 출옥한 후 3년간 주사액으로 꼬치꼬치 마른 몸이 호박처럼 되어 목덜미에 주름이 잡혀 도야지 별명도 들었다. (고일, ‘향토 노동(老童)의 행운아’, ‘주간인천’ 1955년 2월 16일. 신연수 시인 제공)

15세 소년을 태형 90대를 때려 가석방하다니, 다시는 독립운동 따위를 생각 못하게 하려는 일제의 악독한 행동이었다. 당시에 장독(杖毒)으로 죽은 사람이 숱하게 많았다. 패망한 왕조의 군대에서 만호 직책을 가졌었고 애국충정을 품었던 아버지 임용환은 터지고 부어오른 아들의 엉덩이를 보며 피눈물을 흘렸을 것이다.

“어린 몸이 죽지 않은 게 천운이다. 이제 독립운동 따위 꿈도 꾸지 말어라.”

임갑득은 그러겠다고 울며 다짐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저항정신은 뒷날 되살아났다.

■ 감옥을 나와서 YMCA 중학부로

임갑득이 공부한 YMCA 중학부가 들어 있던 황성기독청년회 건물. /민족문화대백과사전 제공
임갑득이 공부한 YMCA 중학부가 들어 있던 황성기독청년회 건물. /민족문화대백과사전 제공

1920년 2월, 서대문감옥에서 태형을 맞고 가출옥한 임갑득은 엉덩이 주사 치료를 받으며 경성 종로의 YMCA 중학부에 들어가 다시 기차통학을 했다. 그의 집 주소는 일제의 감시대상인물카드에 우각리(현 동구 창영동) 55번지로, 영화학교 학적부는 외리(현 중구 경동) 169번지, 3·1운동 재판 판결문은 외리 164번지로 실려 있다. 출옥 후에는 외리 164번지에 산 것으로 보인다. 축현역이 가까워 통학 기차 타기에 좋았다.

YMCA 중학부의 교장 격인 월남(越南) 이상재(李商在)는 신사유람단 일원으로 일본을 시찰하고 대한제국 말기에 외교관도 지냈다. 나라가 망한 뒤에는 YMCA를 중심으로 청년들을 이끌었다. 3·1운동의 배후 인물로 지목되어 구속되었다가 풀려나 YMCA 학관 운영을 맡고 있었다.

그는 생도들의 정신 무장을 강조했다.

“범에 물려 가도 정신만 차리면 산다는 말이 있지 않느냐. 우리 신세가 지금 범에게 물린 신세나 다름없다. 두 눈 부릅뜨고 공부해라.”

당시 조봉암(曺奉岩)과 박남칠(朴南七)이 수학하고 있었는데, 일제에 대한 저항정신이 컸다. 조봉암은 강화에서 독립선언서를 복사 배포한 혐의로 구속되었다가 증거 불충분으로 석방되었고, 박남칠은 인천상업학교의 만세 시위를 주도한 혐의로 퇴학당한 터였다. 임갑득의 투쟁이 두 사람보다 뚜렷했다.

두 아버지(친부와 양부)의 신신당부도 있었고 소년의 나이로 겪었던 감옥생활, 태형 90대를 생각할 때마다 몸서리쳤으나 YMCA 중학부 스승과 학생들 분위기 속에 임갑득의 투지는 다시 살아났다.

■ 치과의학교 입학, 통학생회문예부와 칠면구락부

임갑득 지사의 경성복심법원 판결문. 국가기록원 2019년 삼일절 100주년 ‘알려지지 않은 사람들 독립 만세를 외치다’ 전시 자료. /국가기록원
임갑득 지사의 경성복심법원 판결문. 국가기록원 2019년 삼일절 100주년 ‘알려지지 않은 사람들 독립 만세를 외치다’ 전시 자료. /국가기록원

1922년 봄, 영민했던 임갑득은 10대 1 이상 경쟁을 뚫고 경성치과의학교 입시에 합격했다. 2회 입학생이었다. 이 학교는 1929년 경성치과의학전문학교로 승격했고 현재는 서울대 치의과대학으로 이어지고 있다.

경인통학생친목회가 1920년에 곽상훈(郭尙勳)에 의해 조직되어 있었다. 임갑득은 이 모임의 문예부에 들었다. 리더는 양정고보에 다니던 고일이었다. 그는 뒷날 임영균이 창간 운영한 ‘주간인천’에 연재하고 출간한 ‘인천석금’에서 문예부가 ‘민족해방정신을 내포한 문학운동을 전개했고 독립정신을 바탕으로 한 민족문화운동을 펼쳤으며, 구성원은 고유섭·정노풍·진종혁·임영균·조진만 등이었고 등사판 간행물을 발행했다’고 썼다.

고일은 극(劇) 연구와 공연을 겸하는 단체 칠면구락부에 대해서도 썼다. ‘토월회의 무대장치가 원우전, 배우이자 연출가였던 정암, 극작가 진우촌, 그리고 임창복·임영균·한형택·김도인, 필자(고일) 등이 간부진이었다.’라고 했다. 앞에서 인용한 ‘향토 노동의 행운아’에는 칠면구락부 간판을 임영균이 자기 집에 걸었다고 썼다. 이제 인천문화예술사를 논할 때 주소를 그의 집 외리 164번지로 써야 할 것이다.

/이원규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