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흥창역 인근 ‘옛맛 서울 불고기’
관행 편승않고 노포보다 착한 가격
뭇국의 황홀경 고기 국물에 만개
김치말이 국수 사라진게 아쉬울뿐
인간의 후각은 아주 오랜 기억마저 선명하게 소환한다. 예닐곱 살 무렵 엄마 손을 잡고 가끔 동네 시장에 갔다. 그 길목에는 초록색 외관의 번듯한 음식점이 있었다. 그 초록집을 지날 때면 항상 코끝을 자극하는 향이 났다. 그것이 숯불 불고기 향이라는 것을 알게 된 건 시간이 꽤 흐른 후였다. 불고기는 어느 ‘불’에 구웠느냐가 맛과 향을 결정한다. 초록집의 불고기와 잔칫날 집에서 먹던 불고기의 향이 달랐던 건 불 때문이었다.
소고기를 갖은 양념에 버무려 둥근 동판에서 굽는 불고기는 서울 사람들의 전통 음식이다. 그런데 예나 지금이나 불고기는 비싸다. 평양냉면 맛집인 우래옥의 불고기는 150g에 4만6천원, 1939년 종로에서 문을 연 한일관의 불고기는 200g에 5만8천원이다. 과거부터 불고기가 턱없이 비싼 것은 설탕과 관련이 있다. 불고기의 주요 양념은 설탕, 간장, 마늘이다. 설탕은 1980년대 초까지 명절 선물용 캔으로 유통될 만큼 귀했다. 하지만 설탕이 흔해지고 수입 육류로 선택지가 넓어진 현재까지도 불고기의 고가 행진은 이어지고 있다. 이런 관행에 편승하지 않고 착한 가격에 정통 서울식 불고기를 선보이는 곳이 있다. 광흥창역 5번 출구에 있는 ‘옛맛 서울 불고기’다. 이곳의 불고기는 300g에 2만2천원이다. 앞서 언급한 노포들과 비교하면 가격이 4분의 1 수준이다.
주문 뒤 차려지는 기본 찬은 투박하다. 쌈 채소, 김치, 석박지 그리고 불고기 소스 정도이다. 그러나 불고기가 등장하기 전, 1인당 한 그릇씩 내어주는 뭇국이 분위기를 반전한다. 장담컨대 서울 어디에서도 이만한 뭇국은 만나기 힘들다. 국물을 한 모금 들이켜는 순간, 거부할 수 없는 이끌림에 소주를 주문한다. 문득 그리스 신화의 주신(酒神) ‘디오니소스’가 스친다. 디오니소스는 아버지 제우스의 넓적다리 안쪽, 차디찬 어둠 속에서 달이 찰 때까지 인고의 시간을 견딘 후 태어났다. 그 기다림 속에서 응축된 생명의 농도가 있다면, 바로 이 뭇국의 깊은 맛과 같지 않을까.
이윽고 참숯에 불이 붙고 달구어진 동판 위에서 불고기가 익어간다. 고기 사이로 흘러내리는 진한 국물은 로마 신화의 주신 ‘바쿠스’가 흘리는 기쁨의 눈물이다. 바쿠스의 어원은 돋아나는 싹이다. 이 진한 국물은 입안에서 싹을 틔우며 미각의 절정을 향해 뻗어나간다. 뭇국에서 시작한 황홀경은 불고기 국물에 이르러 비로소 만개한다. 그리고 바쿠스의 눈물은 끊임없이 또 다른 소주잔을 싹틔운다.
과거 매장 규모가 더 컸을 때는 하루에 소 두 마리 분량의 등심을 썼다고 한다. 회전율이 높으니 고기가 신선했다. 이 집 맛의 비결은 선도였다.
예전에는 5천원짜리 김치말이 국수가 있었다. 사골육수에 묵은지의 국물을 섞어서 말아낸 진국이었다. 인공 조미료 맛이 느껴지지 않는 붉은 살얼음 육수만으로 불고기의 기름진 맛을 완벽히 잡아내던 일등 공신이었다. 지금은 메뉴에서 사라져 맛볼 수 없다. 못내 아쉬울 뿐이다.
숯불 위의 동판에서 지글거리며 익어가는 불고기와 코끝을 스치는 향, 그리고 깊은 풍미를 갖춘 뭇국은 시대를 관통하는 진짜 서울의 맛이다. 이곳은 불합리한 가격 관행에 타협하지 않고 정통의 맛을 고집한다. 서울식 불고기의 본질을 만나고 싶은 이들에게 주저 없이 ‘옛맛 서울 불고기’를 추천한다.
/조용준 맛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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