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법 사금융 논란 속 되짚어본 고려시대 전당 문화
이규보, 갖옷 맡기고 좁쌀 한 말 받아 연명
고리대금에 자녀·노비까지 전당 잡히던 시대
강화에도 성행했던 고려의 ‘서민 금융’
불법 대부는 무효라는 이재명 대통령의 얼마 전 발언 이후 우리 금융 당국이 약탈적 불법 사금융 문제 해결을 위한 고강도 조사에 착수했다. 그러나 금융권 문턱을 넘기 어려운 돈 없는 서민 입장에서는 뻔히 그 폐해를 알면서도 고율의 이자를 부담해야 하는 사금융에 매달릴 수밖에 없는 처지다. 급전이 필요한 이들에게 그나마 맡길 물건이라도 있다면 전당포 역시 반갑게 보이기 마련이다. 전당포도 대부업 허가를 얻어야 영업할 수 있다.
최근에는 전당포 간판을 찾아보기 쉽지 않을 정도로 그 숫자가 줄었지만 여전히 영업하는 전당포는 있다. 강화읍에도 제1금융권에 속한 은행 건물 건너편 2층에 전당포가 있다. 시중은행과 서민 금융의 대표 격인 전당포가 마주 보고 있는 형국이다.
이 전당포가 고려시대에도 있었다. 물건을 맡기고 돈이나 먹거리를 융통하는 것은 그때나 지금이나 없는 사람들이 찾는 최후적 수단이다.
고려시대 최고의 문장가이자 고위 관료를 지낸 이규보조차 만년에 집에 쌀이 떨어질 정도로 가난하게 살았다. 71세에 지은 시에 그 궁핍함이 잘 드러나 있다. ‘최근에 자주 식량이 떨어져 탄식하다가 짓다’라는 제목의 시. ‘우리 땅에 재상했던 이 몇몇이나 되는가/나 또한 외람되게 정승했던 몸이로세/나만이 청백했고 남은 그렇지 않은 것 아니련만/어찌하다 가난 걱정 홀로 면치 못하는고.’
일국의 정승까지 지낸 자신의 가난함을 스스로 탓하는 내용이다. 이때 이규보는 집에 있는 어떤 물건이라도 들고 강화시내의 전당포에 가서 쌀이라도 바꾸어 왔을 테다.
술 좋아하고, 시 쓰기에 빠져 지낸 이규보는 젊은 적에도 역시나 가난했다. 39세이던 1206년에 쓴 ‘옷을 전당 잡히고 느낌이 있어 최종번 군에게 보이다’라는 시를 보면 당시 어려웠던 이규보 집안 사정이 훤하다. 음력 3월이었는데, 아침거리가 없었다. 아내는 갖옷을 전당포에 맡겼다. 귀한 옷을 맡기면 넉넉히 받아 와 며칠은 먹겠거니 했는데, 전당포에서는 고작 좁쌀 한 말 내주었다. 여름이 다가오는데 털가죽 갖옷이 무슨 값어치가 있냐는 이유였다. 이규보는 책만 읽고, 세상 물정 모르는 자신을 책망했다. 또한 못난 자신으로 인한 이 가난과 수모를 두고 누구를 원망하느냐면서 회초리를 들고 자기 종아리를 때리기도 했다. 앞으로는 가난을 벗기 위해 힘껏 애쓰겠다고 다짐도 했다.
고려시대에는 고리대금 때문에 자녀를 전당 잡히거나 팔기까지 했다. ‘고려사’ 1356년 6월(공민왕 5년) 기록을 보면, 이런 폐단을 없애고자 나라에서 이자에 이자를 더해 받는 고리대금을 금지시키기까지 했다.
노비를 맡기고 돈을 융통하기도 했는데, 이를 ‘전당(典當)’이라고 했다. 우리가 요새 쓰는 ‘전당포(典當鋪)’와 같다.
강도(江都) 시기에는 개성 시절의 사회 시스템을 그대로 옮겨 왔으니 강화에서 이규보가 나이 들어 어렵게 살 때도 젊을 적 전당포에 갖옷을 맡기고 쌀을 빌렸을 때처럼 전당포 영업은 성행했을 터이다. 물론 이게 고려 후기까지 그대로 이어졌다.
일제강점기에는 전당포를 ‘질옥(質屋)’이라 했다. 이는 일제강점기 인천에서 태어난 조각가 조규봉(1919~1997)의 창영초등학교 학적부에서 확인할 수 있다. 여기 조규봉 부친 직업란에 ‘질옥’으로 쓰여 있다. 조규봉은 해방공간에서 북한 땅에서 작품 활동을 하다 그곳에 남았는데, 북에서 발간된 ‘조선역대미술가편람’에 보면 ‘사무원 가정에서 출생했다’고 돼 있다. 조규봉은 북한 당국에 부친이 ‘전당포’를 했다는 점을 숨긴 것으로 볼 수 있다.
/정진오기자 schild@kyeongi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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