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투사·치과의사·정치인·언론인…
시간이 흘려쓴 인생, 역사는 받아 적었다
치과병원 성공 개원 이후 수차례 후원금 기록
인천부의회 의원으로 조선인들 권익 위해 싸워
경기매일신문 1956년 창간, 경인일보 맥 이어
민족운동 생애… ‘인천의 긍지’로 헌양해야
■ 치과 개업 성공 상류사회로
임영균이 1927년 봄 내리(內里·현 중구 내동)에 인천 처음으로 치과병원을 열자 환자들이 밀려왔다. 그는 몇 달 만에 부(富)와 명예를 한 손에 쥐며 일약 명사 반열에 올랐다. 그해 12월 14일, 보이스카우트 활동사진대회에 명사 유지들과 더불어 후원금을 낸 기록이 ‘조선일보’에 있다. 1928년 7월, 무도관(武道館) 창립 1주년을 맞아 또 기부했다. 이후에도 큰 행사에 후원금을 냈고, 23~24세에 인천 상류사회에 자리 잡았다. 경찰의 감시를 피해 인천청년동맹에 은밀히 활동자금을 보냈을 만한데 증언이나 기록은 없다.
1931년, 처가의 인천양조장이 우각리 7번지에 자리 잡고 살림집도 기와집으로 같이 지었다. 양조장의 성공은 임영균의 장모(호적에는 안병옥으로 실려 있다)의 솜씨가 좋아 술맛이 뛰어났기 때문이라고 전한다. 임영균의 치과병원도 그리 옮겼고 환자는 여전히 줄을 섰다. 그는 가난한 사람들이 보리쌀 한 되, 달걀 한 꾸러미를 치료비로 갖고 오면 사양했다. 그런 가운데 아이들이 태어나고 평온한 나날이 이어졌다.
처가의 인천양조장은 더 크게 번창했다. 1938년 9월 27일 ‘동아일보’는 ‘반세기 일개 어촌 국제적 항도로 웅비’라는 ‘인천특집’에서 최병두가 ‘강직한 실천력과 기민한 판단으로 인천양조업계를 장악하고 있다’라고 소개했다.
■ 인천부의회 의원 당선 조선인 권익 옹호
임영균은 1939년 뜻밖의 선택을 했다. 인천부의회 의원에 출마해 당선된 것이다. 민생을 위해서라고 그해 5월 19일자 ‘조선일보’에 출마의 변(辯)을 밝혔다. 가족과, 치과병원과, 처가에서 경영하던 인천양조주식회사의 방패막이를 위해 선택한 길인 듯하다. 몇 해 전 인천상업학교에 다니던 아우 임근수(林根洙)가 일본인에게 이유 없이 폭행당해 2개월 병원에 입원한 일이 있었다(‘동아일보’ 및 ‘조선중앙일보’ 1934년 6월 8일자). 그것도 부회의원 출마의 원인이 된 듯하다.
일제는 조선인 사업가들에게 군용비행기 헌납이나 국방헌금을 강요하고, 대동아공영 정책을 찬양하는 광고를 친일 매체 ‘매일신보’에 싣게 했다. 수많은 인천 유지들이 헌금하고 ‘흥아신춘(興亞新春)’ 광고를 실었는데 임영균 이름은 없다.
그의 부회 의원 시절 발언을 찾아보면, 조선인지구 주택지 조성 문제를 따졌고, 인천공회당에 의자가 부족하니 완비하라고 요구했고, 조선인지구 가로등이 부족하니 증설하라 따졌고, 하수구를 정비하라고 일본인 인천부윤에게 요구했다. 정신 빠진 부회 의원들이 ‘창씨개명을 우리가 먼저 하자’는 동의안을 내자 보류하자고 제안한 것도 기록에 보인다. 그는 일제 통치에 다시 저항하지는 못했으나 부의회에서 차별받는 조선인의 권익을 지키는 데 열중했다.
1942년 봄, 임영균의 아우 임근수는 연희전문학교를 졸업하고 YMCA 중학부의 후신인 영창학교(永彰學校) 교원으로 일하고 있었다. 그는 그해 6월과 7월, 월간잡지 ‘조광’에 ‘덕적도’와 ‘다시 덕적도’를 기고했다. 덕적도에 대한 최초의 문화보고서로서 그 가치가 매우 크다(인천작가회의 ‘작가들’ 2015년 겨울호 및 ‘경인일보’ 2016년 1월 31일자). 그는 신문기자를 거쳐 서울대 신문학과 교수를 지냈다.
■ 8·15 광복 후의 언론인으로
8·15 광복 후, 임영균은 독립투쟁, 민족운동에 매진한 과거에 관해 침묵하며 인심 좋은 치과의사로 살았다. 1948년 봄 제헌의원 선거 때, 장인 최병두는 인천양조장 1층 사장실을 조봉암에게 선거사무소로 내주었다. 조봉암이 당선되고 초대 내각의 농림부장관에 오르면서 최병두의 공덕이 커졌다.
임영균은 1950년 경기도 선거관리위원을 맡았을 뿐 국회의원, 시의원으로 출마하지 않았다. 1954년 4월 ‘주간인천’ 신문을 창간했다. 그 신문에 연재하고 창간 1주년 기념으로 출간한 것이 고일의 ‘인천석금’, 인천의 보물 같은 책이다.
손자인 임상호 씨 증언에 의하면 조부는 폐간한 인천의 일간지 ‘대중일보’를 계승한 ‘경기매일신문’을 1956년에 창간했다고 한다. ‘경기매일신문’의 맥은 ‘경인일보’로 이어지고 있다.
그는 한때 전동(錢洞)에 살기도 했으나 생애 후반을 창영동 7번지 양조장 집에서 살았다. 노년에 들어 경기도 치과의사회 회장과 인천 로터리클럽 회장을 맡아 사회봉사를 실천했다. 폐(肺) 질환이 있었다. 1966년 서울에 갔다가 쓰러졌고 서대문구의 한 병원에서 눈을 감았다. 그의 유해는 인천 서구 원적산 관통도로 근처 장인 최병두의 묘소 옆에 묻혔다가 1980년 천안공원 묘지로 옮겨졌다.
■ 후손들
그의 아내 최정순은 2006년 별세했다. 장남 임명진(林明鎭)은 외교관의 길을 걸으며 서양화가로도 명성을 떨쳤다. 2018년 4월, 90세이던 그는 생가를 돌아보고 싶어 창영동에 왔다. 김구연 아동문학가, 정승열·조우성 시인·김보섭 사진작가, 그리고 필자가 달려가서 배다리에서 보낸 소년 시절의 회상을 들었다.
그는 2024년에 별세했다. 딸 임혜영(林惠英)은 미국 웨슬리안(Weslean)대학에서 미술사를 전공했다. 외조부 최병두가 설립한 인천양조주식회사 대표이사로서 부평구 청천동에서 인천의 명주인 소성주(邵城酒) 생산의 맥을 이어가고 있다.
차남 임경진(林慶鎭)은 신문사와 통신사 기자를 지냈고, 출판사 경영도 했다. 인천 정미업계의 유명한 주씨 집안의 주현숙(朱賢淑)과 결혼했다. 임경진과 주현숙은 창영동 집에서 부모 곁을 지켰다. 부부의 아들 임상호(林相浩)는 건축가로 활약하고, 딸 임자영(林慈英)은 김은하(金殷夏) 국회의원의 며느리가 되었다. 차남 임선호(林善浩)는 항공 엔지니어로서 KAI에서 일했다.
딸 임화진(林和鎭)은 이화여대 성악과를 나와 미국에 유학 갔으나 성대결절을 극복하지 못하고 성악가의 꿈을 접었다. 삼남 임형진(林亨鎭)은 인천고 재학 중 연식정구 선수로 명성을 날렸고 인천양조장 대표를 지냈다.
■ 훈장 추서 인천이 나서야 한다
3·1운동 지사들은 세 가지 길 중 하나를 선택했다. 첫째, 더욱 가열찬 투쟁에 나서 투옥을 거듭하다가 옥사하거나 망명했다. 둘째는 일제의 회유에 넘어가 친일하는 길, 셋째는 은인자중하며 침묵하는 길이었다. 임영균은 14~15세에 감옥살이하고 태형 90대를 맞았다. 다 잊겠다고 다짐하며 개명하고, 참지 못해 민족운동을 하다가 또 개명하고, 그 후 눈을 꾹 감고 침묵했다.
일제강점기 후반 인천부회 의원으로 일한 것은 차별받는 조선인의 권익을 위해 애썼기는 하지만 병원과 장인의 사업을 지킨 것 말고 뭔가 특혜도 받았을 테니 안 했으면 좋았을 타협이었다. 그 경력이 부끄러웠는지 그는 일제에 맞서 투쟁한 과거를 자식들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그러나, 누가 그에게 왜 끝까지 싸우지 않았냐고 말할 것인가? 역사는 때로 가혹한 망각의 강을 건너야만 도달할 수 있는 진실이 있다. 임영균의 생애에는 한국과 인천의 민족운동사가 고스란히 들어 있다. 국가보훈부는 치밀하게 조사한 뒤 과(過)가 없다면 훈장을 추서하고, 인천시는 정중히 그를 현양해야 한다. 독립투사의 피어린 희생에 대한 보답이고, 나아가서 인천의 긍지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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