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독서 목숨 잃어간 광부들

유해 송환은 남겨진 동포 몫

국내 외국인 노동자들 처지

반세기전 우리 상황과 닮아

1963년 열린 서독 파견 광부 결단식. /국가기록원 제공
1963년 열린 서독 파견 광부 결단식. /국가기록원 제공

파독 광부의 시신은 아연관에 담겼다. 장례사와 상의해 관을 맞추고 시신에서 흘러나온 액체가 새지 않도록 완전히 봉한 뒤 비행기에 실었다. 한 사람을 고향으로 보내는 데는 무려 몇 천 마르크가 들었다. 1970년대 서독에서 일한 한국인 광부의 월급은 600마르크 정도(한화 15만원)로 당시 한국 기업 월급이 2만~3만원이던 시절이었다. 서독에서 일한 광부 김근철씨는 훗날 그 일을 “참 힘들었다”고 기억했다.

김씨는 광산 통역을 맡았다. 이곳에서 일하던 한국인들이 병원에 실려 가거나 경찰 조사를 받을 때, 물건을 사거나 편지를 써야 할 때도 불려다녔다. 죽음 뒤의 일도 예외가 아니었다. 사고사 등으로 숨진 한국인의 시신을 한국으로 보내는 일을 한국인 통역이 주선했다. 한국인들은 화장을 하지 않았다. 가족이 원하면 시신을 온전히 보내야 했다. 김씨가 그렇게 보낸 시신은 10여 구. 이 증언은 국사편찬위원회가 2012년 수집한 파독광부 50주년 기념 구술을 바탕으로 펴낸 ‘파독광부 생애사’에 실렸다.

뚜안, 스물셋 죽음 뒤의 벽 | 경인일보

뚜안, 스물셋 죽음 뒤의 벽 | 경인일보

불친절은 죄가 아니다. 위임장을 받아주지 않은 것도, 부검 동의를 구할 방법이 없다고 한 것도 절차 위반은 아니다. 법은 무엇을 했는지 묻지만 어떻게 했는지는 묻지 않는다. 한국어가 서툰 외국인이라서 한 번 더 설명해주고, 한 번 더 기다려주고, 한 번 더 물어봐주는 일은 어떤 법에도 의무로 적혀 있지 않다. 그 ‘한 번’을 사람들은 감수성이라 부르지만 ‘몰감수성’은 죄가 되지 않는다. 사고 다음 날 찾아간 경찰서. 사흘 뒤 한국과 베트남에 동시에 차려진 두 개의 빈소. 한 달 뒤 동생이 다시 찾은 사고 현장. 그 세 곳에서 목격한 것은 법이 닿지 않는 자리에서 한 가족이 먼 거리 때문에 외롭게 버텨야 했던 석 달의 시간이었다. 누구도 절차를 어기지 않았다는 그 말은 결국, 누구도 더 살피지 않아도 됐다는 말과 다르지 않았다.
https://tuan.kyeongin.com/

1960~70년대 서독으로 간 한국 광부들은 외화를 벌기 위해 떠난 노동자였다. 말이 통하지 않는 나라에서 일했고 몸에 맞지 않는 장비를 들고 깊은 지하의 막장으로 들어갔다. 죽음 뒤 고향으로 돌아가는 길은 멀었다. 관을 맞추고 서류를 챙기고 항공편을 알아보고 비용을 마련하는 일은 남은 동포들의 몫으로 남았다. 그때 서독은 현재 한국과 겹친다. 그때 한국인과 현재 재한 베트남인도 그렇다.

그로부터 반세기가 지난 2026년 봄, 이천의 한 자갈공장에서 베트남 청년 뚜안씨가 숨졌다. 시신 송환은 절차와 비용이 함께 붙는 일이다. 유해를 본국으로 보내려면 염습과 방부처리를 거쳐 항공 규격 관에 입관하고 사망진단서와 방부확인서, 영사확인서 등을 갖춰야 한다. 경기도외국인인권지원센터의 ‘이주민 활동가를 위한 상담 매뉴얼’에 따르면 장례비용은 1구당 600만~1천만원에 달하고 유골 송환은 400만원(태국 기준)이다. 화장 없이 시신을 온전히 보내려면 무게와 국가에 따라 비용이 더 올라갈 수 있다.

종교와 관습 때문에 화장을 받아들이기 어려운 가족도 있다. 2021년 화성의 한 폐기물 수집업체에서 컨베이어벨트에 끼여 숨진 튀르키예 국적 노동자 K(27)씨가 그랬다. 이슬람 전통에 따라 시신을 온전히 고국으로 보내야 했고 방부 처리된 시신을 튀르기예행 비행기에 싣기까지 한국에 살고 있는 튀르키예인들이 비용을 나눠 부담했다. 동남아시아처럼 가까운 나라도 시신 운송 비용은 최소 1천만원 이상으로 알려졌고, 튀르키예처럼 먼 나라는 그 이상이다.

어느덧 한국은 노동자를 보내던 나라에서 노동자를 받아들이는 나라가 됐다. 20세기 독일에서 그 자리를 지킨 것이 동료 통역사들이었다면, 21세기 한국에서 같은 자리에 선 것은 이주노동자의 동료와 이주인권 활동가들이다.

/유혜연기자 pi@kyeongi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