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수된 서고 복원 중 금서 발견

‘못읽는 책’ 국가가 정하던 시절

美 애국법, 도서 이용기록 요구

검색기록 지우며 저항한 사서들

권순대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
권순대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

연극 ‘사사로운 사서’(강현주 작·연출, 6월20~28일, 명동예술극장)는 도서관 사서들의 이야기이자 책에 관한 이야기이다. 폭우로 서고가 침수되자 사서들의 분투가 시작된다. 사서들이 침수된 책을 복원하는 작업 과정이 그대로 연극의 전개 과정으로 펼쳐진다. 복원을 끝내고 임시 휴관을 마치면 연극도 막을 내리게 된다.

이야기의 중심에는 뒤늦게 돌아온 책이 있다. 작가가 모티프를 가져왔다고 밝힌 실제 사건은 무려 84년이 지나서야 도서관에 돌아왔다. 핀란드 헬싱키 중앙도서관에서 있었던 일로 도서 대출 카드에 적힌 반납일은 1939년 12월27일이었다. 소련의 침공이 있던 시절의 이야기다.

연극에서는 금서가 있던 시절 우물에 묻혔던 책이 폭우 사태를 지나면서 발견된다. 도서관 사서 팀장인 재선의 에피소드와 맞물리면서 뒤늦게 도착한 책에 얽힌 사연이 소개된다. 그렇게 해서 읽을 수 없는 책의 목록을 국가가 정하던 시절의 진실에 다가서고자 했다.

뒤늦게 돌아온 책 모티프는 발견의 서사에 속한다. 이 서사에는 기본적으로 책을 빌려 간 사람과 책을 반납하는 사람이 있기 마련이다. 그 둘이 한 사람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책을 빌려 간 사람과 반납하는 사람이 다른 사람이라면 두 사람의 관계가 무엇보다 중요하다. 가족일 수도 있고, 아니면 두 사람의 거리가 너무 멀어서 우연한 발견의 이야기일 수도 있다. 삼대에 걸쳐 세계사적 격변을 겪는 동안의 긴 시간을 배경으로 하는 대서사를 엮을 수도 있겠다.

여기에 책과 관련이 깊은 직업을 가진 여인이 등장해 이루어질 수 없는 연인의 사랑 이야기를 곁들여도 좋다. 마치 늦게 도착한 편지가 과거의 진실을 발견하게 하는 것처럼, 뒤늦게 도착한 책 모티프는 발견의 서사를 기록하게 된다.

당신이 무엇을 먹었는지 말해주면, 당신이 어떤 사람인지 알려주겠다는 말이 있다. 프랑스의 어느 미식가가 했다고 알려진 이 말은 먹는 음식이 그 사람의 정체성을 드러낸다는 뜻을 담고 있다. 이 문장이 경험적으로 설득력이 있다는 걸 우리는 안다. 세 끼 모두 붉은 고기를 먹는 사람과 채식을 하는 사람은 분명 다를 것이다.

그래서인지 이 문장은 여러 형식으로 바꿔 쓰이기도 한다. 이를테면, 음식을 뜻하는 자리에 다른 단어를 넣는 방식이다. 옷을 넣으면 무엇을 입는지에 따라, 집을 넣으면 어디 사는지에 따라 그 사람의 정체를 유추할 수 있다는 얘기다. 입는 옷을 알고, 먹는 음식을 알고, 사는 집을 알면 그 사람을 아는 것이다. 살아가는 데 의식주만큼 중요한 게 또 어디 있겠나.

이 문장에 양념을 약간 쳐보자. 당신이 읽은 책을 말해주면, 당신이 어떤 사람인지 말해주겠다. 이 문장이 그럴듯하게 들린다면 아마도 이런 생각을 떠올렸을 수 있겠다. 그래, 맞아. 일 년에 책을 한 권도 안 읽는 사람, 텔레비전에 나온 책만 읽는 사람, 바람이 부는 소리에 시집을 펼치는 사람이 같을 수는 없겠지. 암, 그렇고말고.

이제 거의 다 왔다. 다음 문장은 이렇다. 당신이 대출한 책을 말하라, 그러면 당신을 체포하겠다. 양념이 아니다. 사실이다. 이 문장은 미국 애국법에 맞선 사서들의 저항 서사에서 만날 수 있다. 미국 애국법은 9·11 이후 정보 수집과 감시 권한을 대폭 확대한 법이다. 특히 215조는 국가안보 조사라는 명목으로 도서관 이용 기록을 요구할 수 있게 했다.

비밀 유지 명령으로 그 사실을 사서가 이용자에게 알릴 수 없도록 금지했다. 이에 사서들은 도서 대출과 검색 기록을 삭제하고 최소화하는 정책을 도입하거나, 애국법에 협조하지 않는다는 내용의 포스터를 붙이거나, 비밀 유지 명령에 맞서는 투쟁을 전개했다.

애국법은 알고 있었다. 대출 목록을 보면 그 사람을 알 수 있다는 것을 말이다. 신용카드 사용 목록만큼이나 도서 대출 목록이 내가 누구인지 말해주고 있었다.

연극은 다음 대사를 남기며 막을 내린다. “누군가에게 책을 읽는다는 건 세상에 대항하는 것이다.” 뒤늦게 돌아온 책에 기록된 이 한 문장을 발견하기 위해 이 연극은 시작되었다.

/권순대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

<※외부인사의 글은 경인일보의 편집방향과 다를 수도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