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온라인에 중국인 구별법으로

‘을지로입구역’ 발음 비하글 게시

관동대지진 직후 日 떠올리게 해

한국학도 배제·혐오 언어 성찰을

옥창준 한국학중앙연구원·한국학대학원 정치학 조교수
옥창준 한국학중앙연구원·한국학대학원 정치학 조교수

수업 시간에 해방 이후 서울의 거리 이름을 이야기한 적이 있다. 일본인이 많이 살던 거리에는 이순신의 이름을, 중국인이 많이 살던 거리에는 을지문덕의 이름을 붙였다는 이야기였다. 이처럼 지금은 외국인들도 즐겨 찾는 ‘힙지로’의 을지로는, 해방 이후 한국 사회가 새로운 정체성을 만들어가는 과정에서 오래된 장소를 어떻게 다시 이름 붙였는지를 보여주는 흥미로운 공간이기도 하다. 거리 이름은 단순한 행정 명칭이 아니라, 한 사회가 과거를 기억하고 현재의 경계를 설정하는 방식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최근 이 을지로가 조금 다른 방식으로, 더 섬뜩하게 환기되는 장면을 보았다. 온라인에서 중국인을 가려내는 방법이라며 ‘을지로입구역’을 발음해보게 하자는 글을 본 것이다. 최근 한국 사회의 일부 집회와 온라인 공간에서는 외국인을 향한 적대감이 반복적으로 표출되고 있다. 민주주의의 ‘순수성’을 말하면서도 이웃의 얼굴과 발음을 검문하려는 장면 앞에서, 민주주의는 어느새 배제의 언어로 오염되고 있다. 이 장면은 1923년 관동대지진 직후의 일본 사회를 떠올리게 한다. 당시 조선인이 우물에 독을 풀었다는 유언비어가 퍼졌고, 발음이 어색한 사람들은 조선인으로 몰려 살해되었다. 우리가 이 사건에서 기억해야 할 것은 조선인 수천명이 희생되었다는 사실만이 아니다. 그 학살이 당시 동아시아에서 가장 근대화된 도시 가운데 하나였던 도쿄에서 일어났다는 사실이다.

역사는 이렇게 말한다. 인종주의는 언제나 낯선 야만의 얼굴로만 등장하지 않는다. 그것은 경제적 불안, 정치적 불신, 사회적 위기의식 속에서 일상적인 언어로 서서히 스며든다. 그리고 그 불안은 대개 가장 약한 위치에 놓인 사람들에게 가장 먼저 폭력적으로 터져 나온다. 관동대지진 이후 벌어진 학살은 이를 보여주는 비극적인 사례다. 그때 위험했던 것은 유언비어 그 자체만이 아니라, 그 유언비어를 그럴듯한 의심으로 받아들이게 만든 사회적 분위기였다. 한국에서 살아가는 외국인들은 최근의 현실을 보며 어떤 마음일까. 자신의 출신과 이름, 외모와 억양을 끊임없이 증명해야만 안전할 수 있는 사회를 어떻게 받아들일까.

한국학은 오랫동안 한국인이 겪은 식민주의와 차별의 경험을 연구해왔다. 해방 이후 충무로와 을지로라는 길 이름을 붙인 마음과 이유를 이해하는 것은 한국학의 중요한 출발점이었다. 그러나 최근의 현상들은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한국학은 한국인이 겪은 고통만이 아니라, 한국 사회가 타자를 어떻게 대했는지, 어떤 순간에 배제와 혐오의 언어를 만들어냈는지도 성찰해야 한다.

한국인의 고통을 기억하는 일은 중요하다. 그러나 그 기억이 오직 한국인의 고통‘만’을 향할 때, 그것은 타인의 고통에 무감각한 기억으로 굳어질 수 있다. 피해의 기억이 반드시 더 넓은 연대의 감각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오늘날 이스라엘의 사례가 잘 보여주듯, 과거의 고통을 깊이 기억하는 공동체가 반드시 타인의 고통 앞에서 더 민감한 윤리적인 공동체가 되는 것은 아니다. 그렇기에 고통의 기억은 피해의식을 강화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지금 우리 곁의 가장 약한 사람들을 알아보기 위해 존재해야 한다. 기억의 윤리는 과거의 상처를 보존하는 데서 멈추지 않고, 그 상처의 언어로 현재의 약자를 알아보는 데서 비로소 완성된다. 그런 점에서 한국학은 한국인의 고통을 기억하되, 그 기억을 통해 타인의 고통에 눈감지 않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는 학문이어야 한다. 적어도 한국이 타인의 고통에 둔감한 공동체가 되는 것을 막는 학문이어야 한다. 한국인의 상처를 기억하는 데 그치지 않고, 그 기억으로 타인의 상처를 알아보는 학문. 한국학은 바로 그 빈자리에서 다시 시작되어야 한다. 한국인이 겪었던 것과 닮은 고통을 겪는 이 사회 안팎의 ‘을’들이 안전하게 살아갈 수 있는 길을 묻고, 그 길을 함께 찾는 학문으로 말이다. 한국학중앙연구원이 발간하는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는 ‘배타주의’와 ‘인종주의’ 항목이 없다. 아직까지는 말이다. 이 빈자리는 단순한 표제어의 부재가 아니다. 한국 사회가 아직 충분히 이름 붙이지 못했고, 그래서 제대로 마주하지 못한 문제의 자리일 것이다.

/옥창준 한국학중앙연구원·한국학대학원 정치학 조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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