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워지지 않은 시간 오랜 기억이 말을 건다
유휴공간, ‘보존과 재생’의 거점으로
폐냉동창고, 예술 품은 문화플랫폼 재탄생
냉각설비·단열재 등 옛 구조물 흔적 눈길
44년 된 휴게소… 철거 대신 부활 선택해
남해대교 역사 잇는 카페·전시관 재단장
오래되고 쓸모를 다한 건축물을 어떻게 다룰 것인가. 경남 남해군은 전면 철거라는 손쉬운 길 대신 ‘기억의 보존과 공간의 재생’이라는 해답을 내놓았다. 그 변화의 중심에는 남해 동남쪽 끝자락 미조항에 우뚝 선 옛 냉동창고 ‘스페이스 미조’가 자리한다. 더불어 남해의 관문에서 오랜 시간 휴게소로 기능했던 ‘남해각’ 역시 궤를 같이하는 재생의 결과물이다. 두 공간은, 과거의 낡은 콘크리트 덩어리를 지역의 역사와 현대적 일상이 교차하는 문화 거점으로 치환했다.
■ 어업의 전초기지, 새로운 패러다임을 꿈꾼 ‘스페이스 미조’
남해군 미조면 미조리 170-32번지에 위치한 스페이스 미조는 지상 4층 규모의 거대한 복합문화공간이다. 미조항은 예로부터 남해 어업의 심장부였고, 이 육중한 철근 콘크리트 건축물은 어민들의 치열한 땀방울과 숨 가쁘게 호흡했던 냉동창고였다. 어업 환경의 변화와 함께 점차 방치되었던 이 거대한 산업 시설은 세심한 리모델링을 거쳐 문화 및 집회시설로 용도를 변경했다.
이 공간의 재생을 이끈 박석희 소장은 현상설계 당시부터 이곳이 기존의 재생 프로젝트를 넘어서는 새로운 패러다임이 되기를 열망했다. 그는 과거 얼음과 생선으로 가득했던 어둡고 폐쇄적인 냉동창고에 “빛을 조각하고, 비와 바람을 가져오고, 남해의 섬과 바다를 펼쳐 놓고자”했다. 단순한 전시관을 짓는 것을 넘어, 방문자가 남해의 자연경관과 예술 속에서 편안한 마음으로 커뮤니티와 만나 예기치 못한 즐거움을 누리기를 바란 것이다. 나아가 공간의 물리적 기능을 넘어, 공공의 모범적인 장소로서 서로에게 시민적 임파워먼트의 촉진제로 작동하기를 바라는 묵직한 건축적 철학을 담아냈다.
■ 예술 작품이 된 냉각 설비와 보존의 기록
박석희 소장의 철학은 건물 곳곳에서 과거의 흔적을 덮지 않고 과감하게 드러내는 방식으로 구현되었다. 건물 1층 내부에는 과거 냉동창고에서 차가운 공기를 순환시키며 해산물의 신선함을 지켜주던 핵심 설비인 ‘냉각 열교환기’가 철거되지 않고 중심에 자리 잡고 있다. 이 거대한 설비는 단순한 기계가 아니라 오랜 시간 공간과 함께했던 기억의 일부로서, 장소성을 보존하는 장치이자 남해 어업의 역사와 시간을 담은 하나의 거대한 설치 예술 작품으로 승화되었다.
녹슨 철제 파이프 구조물 사이로는 현대적인 미러볼을 층층이 매달아 거친 산업 시설과 화려한 장식은 이색적인 대조를 느끼게 해준다. 또한 과거 공간 전체를 서늘하게 유지하기 위해 쓰였던 두꺼운 단열재와 양철판, 산화된 벽면 단면을 가리지 않고 노출시켰다.
이처럼 얼음창고 냉동실의 마감을 어느 정도 남겨두고 기능에 따라 새로운 재료를 덧붙이는 방식으로 방문객에게 기억을 관람하는 특별한 즐거움을 선사한다.
■ 1층부터 4층까지 쉼 없이 이어지는 복합문화 플랫폼
현재 스페이스 미조의 내부는 철저히 방문객의 관람과 휴식, 그리고 지역 문화 활동에 맞춰 실용적인 복합문화공간으로 재편되어 운영 중이다.
1층에는 카페와 전시 공간이 함께 들어서 있다. 방문객들은 거대한 옛 냉각 설비가 뿜어내는 분위기 아래서 커피와 함께 여유를 취할 수 있다. 2층은 일반 관람객의 출입을 제한하는 직원 전용 사무 공간으로 분리해 시설 운영의 효율성을 높였다. 수직적인 공간감을 극대화한 3층은 오롯이 예술 작품에 집중할 수 있는 본격적인 현대미술 전시장과 다목적 공연장으로 쓰인다. 낡은 창고의 뼈대 속에서 음악과 예술을 즐길 수 있는 이 공간은 공연자와 관객 모두에게 색다른 경험을 제공한다.
가장 위층인 4층은 플리마켓과 전시 공간이 결합되어 다채로운 볼거리를 제공한다. 결과적으로 1층과 3층, 4층에 걸쳐 전시장과 휴게 공간이 입체적으로 이어지며 건물 전체가 거대한 문화 플랫폼으로 기능한다. 특히 스페이스 미조는 ‘THE 자연인’, ‘3학년 2학기’ 등 다채로운 장르의 독립영화를 무료 상영하며, 단순한 관광지를 넘어 지역민을 위한 시민적 문화 거점으로서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고 있다.
■ 44년 기억의 산실, 남해의 관문 ‘남해각’
스페이스 미조가 미조항의 산업 역사를 품고 있다면, 설천면 노량리에 위치한 남해각(대지면적 830.00㎡, 연면적 960.98㎡)은 남해 여행과 도민들의 일상적 기억을 다루는 공간이다. 1973년 6월 22일, 국내 최초의 현수교인 남해대교 개통과 연계되어 건축된 이곳은 44년 동안 여관과 식당, 휴게소로 쓰이며 지역민과 깊이 교감해 온 상징적인 건물이다. 수학여행과 관광객들로 발 디딜 틈 없던 남해대교 인근은 2018년 노량대교가 주요간선도로 역할을 넘겨받으면서 활기를 잃었고, 남해각 역시 용도 폐기될 위기에 놓인 유휴공간이 되었다. 하지만 남해군은 이 건물을 철거하는 대신 재생하여 과거와 현재를 존중하는 방식을 택했다. 재생 과정에서 낡은 간판이나 오래된 구조물의 흔적을 억지로 감추지 않았다. 수리한 부분조차 숨기지 않고 드러내는 방식을 통해 방문객이 장소의 본래 모습을 짐작할 수 있게 했으며, 불완전함을 통해 공간이 스스로 재생하며 변화할 여지를 남겨두었다. 외관 역시 남해대교의 역사와 궤를 같이해 온 ‘판옥선’을 모티브로 삼아 역사적 맥락을 투영했다.
■ 진정성을 입고 깨어난 현재 진행형의 재생
최근 남해각은 남해대교 개통 기념일인 지난 6월 22일에 맞춰 정식 개장하며 새로운 도약을 알렸다. 남해군은 지역의 재료와 공간의 가치를 중시하는 유명 카페 브랜드 ‘2016 진정성’을 남해각의 운영자로 선정했다. 이에 따라 남해각은 지하 1층은 카페, 지상 1층은 전시관 형태의 명확한 구조로 재단장되었다. 특히 진정성은 단순히 식음료를 판매하는 입점 업체를 넘어, 남해군과의 적극적인 협의를 통해 남해각 내부에 남해대교와 지역 관련 아카이브 전시 기획까지 통합적으로 관리하며 공간의 문화적 밀도를 높이고 있다.
이와 함께 공간 활용을 효율적으로 재편하는 작업도 이루어졌다. 과거 남해각 내부에 혼재되어 있던 관광안내, 여행자 쉼터, 사무공간 등의 기능은 남해대교 관광자원사업의 일환으로 인근에 새롭게 신축된 ‘웰컴센터’로 모두 이관되었다. 이를 통해 남해각은 불필요한 회의 공간 등을 비워내고, 누구나 부담 없이 찾아와 남해대교와 밤바다의 야경을 감상하며 쉴 수 있는 전시 및 카페 공간 본연의 목적에 더욱 집중할 수 있게 되었다. 나아가 경남의 핵심 사업인 ‘이순신장군 노량해전 큰별 순례길’의 작은 쉼터로서의 역할도 톡톡히 수행할 예정이다.
어업의 전초기지였던 스페이스 미조와 숱한 발걸음이 머물렀던 휴게소 남해각. 두 공간은 공공기능을 상실한 낡은 건축물이 물리적 철거 없이도 어떻게 지역사회의 훌륭한 문화적 자산이자 시대의 이정표로 자리매김할 수 있는지를 명확히 보여주는 모범적인 해답이다.
/경남신문=박준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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