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규보의 시, 고려의 진경산수화가 되다
방아소리·베틀소리·나막신소리… 시 한 편에 담긴 고려의 하루
최우가 재촉하고 고종이 다시 새긴 ‘고려 기록문화의 정수’
강화 백운곡에 남은 이규보 흔적, 기록은 오늘도 역사를 말한다
어떤 일을 뒷사람들이 알 수 있도록 기록하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무척 중요한 과제가 아닐 수 없다. 개인을 넘어 사회와 국가가 나서서 기록 작업을 벌이는 이유이기도 하다. 우리나라의 경우에도 아주 오래전부터 기록 남기기에 특별한 관심을 기울여 왔다. 지금까지 전해지는 고려시대 기록 문화의 정수를 꼽으라면 단연 ‘동국이상국집(東國李相國集)’일 게다.
‘동국이상국집’은 800년 전 고려의 재상을 지낸 이규보(1168~1241) 개인의 문집인데, 당시 국왕과 최고 실력자가 적극적으로 챙기면서 국가 기록물 차원에서 간행됐다. 총 53권으로 짜인 ‘동국이상국집’에는 이규보가 쓴 2천여 편의 시를 비롯해 정치, 문화, 의료, 외교, 관직 등에 이르기까지 고려 사회 전반을 풍속화처럼 들여다볼 수 있게 하는 타임머신이자 그 시대의 문을 열어 주는 열쇠다.
‘동국이상국집’에 실린 이규보의 시가 있어 그 시대 백성들이 어떤 삶을 살았는지 구체적으로 살필 수 있다. 조선시대 겸재 정선의 진경산수화를 통해 조선을 좀 더 실감나게 들여다볼 수 있다면 이규보의 시는 고려시대 진경산수화라고 할 수 있다.
그의 수많은 시 중에 딱 하나만 골라 보자. ‘촌가(村家) 3수’.
‘띄엄띄엄 연기 낀 속에 마을 방아소리/깊은 거리 담은 없고 가시나무만 둘러 있네/온 산엔 말이고 온 들엔 흩어진 소/모두가 태평 시대의 얼굴이네
찬 새벽 짙은 서리에 베틀소리/ 저문 해 검은 연기에 나무꾼 노래하며 돌아오네/들 늙은이가 어찌 구월 구일을 알랴만/만나고 보니 국화 띄운 흠뻑 익은 술일세
산 배나무 잎 붉고 들 뽕잎 누른데/바람 길에 벼 향기가 물씬 풍기네/샘물 긷는 소리 나막신 소리 들리더니/열려 있는 가시 문에 달빛만 서늘해라’
1193년 26세에 썼다. 그의 걸작인 ‘동명왕편’도 같은 해에 나왔다. 마을 공동 방앗간이 있고, 가시로 둘러싼 담장이며 산과 들에는 말과 소들이 뛰어다니고, 집집마다 베를 짜고, 중양절(重陽節) 9월 9일에는 국화주를 담가 먹고, 배나무 뽕나무 농사를 짓고, 동네 공동 우물에서 물을 길어 먹고, 사람들이 나막신을 신고 다니는, 고려시대 시골 마을 풍경을 이보다 더 사진처럼 그릴 수가 있으랴. 팔만대장경을 만들 때의 앞뒤 사정도 ‘동국이상국집’이 있어 가늠할 수 있다.
‘동국이상국집’은 이규보가 74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난 1241년에 당시 최고 실력자 최우가 앞장서서 글을 모으고 판각 작업을 시작했다. 최우는 이규보가 눈을 감기 전에 문집을 내놓고 싶어 했다. 하지만 워낙 글이 많아 일찍 끝낼 수가 없었다.
이규보가 죽음의 문턱을 넘을 때인 8월에 ‘동국이상국문집’ 41권 작업을 마칠 수가 있었고, 그의 장례식이 이루어진 12월에 ‘동국이상국후집’ 12권을 추가했다. 이 작업이 이루어진 곳이 강화도였다. 최우가 나서서 재촉을 했으니, 당대 최고의 판각 기술자들이 모였을 터다.
이렇게 만들어진 ‘동국이상국집’을 10년 뒤에는 임금 고종이 직접 나서 국가기관을 동원해 다시 간행했다. 전에 작업하면서 서두르느라 틀린 곳을 고치고 보탤 것은 증보해 목판에 새겨 발간했다. 그 뒤에도 ‘동국이상국집’은 여러 차례 간행됐다.
이규보의 여러 아호 중 대표적인 게 백운거사(白雲居士)다. 강화군 불은면 두운1리는 이규보가 만년을 보냈다고 알려진 곳이다.
이 동네 사람들은 행정 명칭보다는 이규보가 살았다는 점을 자랑스럽게 여겨 ‘백운’을 강조한다. 2013년 마을 입구에는 ‘백운곡’이라 쓴 커다란 표지석을 세워 놓았고, 버스정류장 이름도 ‘백운곡’으로 정했다. 동네 마을회관과 경로당의 이름에도 ‘백운곡’을 붙였다.
2016년 ‘불은면지’를 만들 때는 ‘이규보 집터’ 찾기에 나서 주춧돌 등을 발굴하기도 했다. ‘동국이상국집’에 실린 이규보의 수많은 글 중 상당수가 이 ‘백운곡’에서 쓰였다고 생각하면서 ‘백운 마을’을 둘러보니, 동네가 한적한 게 참으로 글 쓰기에 좋았으리 싶었다.
/정진오기자 schild@kyeongi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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