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쟁서 화력 좋은 연료로 쓰거나
허망한 따라잡기에 능력 소진도
창작, 협력 영역 넓히는 방법으로
‘작가노조’ 설립, 신고 서둘러라
오래 전이지만, 외국을 가보고 쓴 것 같은 시나 소설은 거들떠보지도 않던 때가 있었다. 시에서 프랑스 어느 지방 소도시의 멋진 풍경이 나오거나 소설에서 어디 독일의 기차역, 이탈리아의 무슨 해변 어쩌구 하는 구절이 나오면 갑자기 욱하는 기분이 들었다. 고등학교를 2학년 때 자퇴하고 오토바이 배달을 하고 공사장에서 막노동을 하며 대학입시를 준비하던 때라 심사가 꼬일대로 꼬였다. 사는 게 편해서 해외여행도 가고 거기서 글도 쓰고 하는구나, 두고 보라지 그런 말랑하게 관조하는 그럴듯한 글이 아니라 진짜 글이 뭔지 보여주마, 하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 후로도 오랫동안 나는 보여주지 못하고 괴로워만 했다.
사실은 경원주택 102호 싱크대 옆에서 밥상을 펴고 앉아 믹스커피를 마시며 쓰는 문장은, 이탈리아 베네치아의 카페에서 창밖을 바라보며 이국에서 표류하는 자아에 대해서 쓰는 글을 절대 이길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너무 가지고 싶은 것을 가지지 못하게 될 때 사람은 질투를 한다. 누군가 지옥 속에서 간신히 걸어나와 오로지 자신을 살려두기 위해 이국행을 결행할 수도 있다는 것을, 그때는 생각해내지 못했다. 그리고 여유가 있어 해외여행을 가면 또 어떤가. 여러모로 고생하는 작가들이 모처럼 여행 한번 가게 되어 글을 쓰는데 괜한 퉁명을 부릴 필요가 없는 것이다. 가난은 좋은 글을 쓰는 데 있어서 필요조건도 충분조건도 아니다. 그건 질투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고통에 오래 노출된 사람의 마음은 둘 중 하나가 된다고들 한다. 내가 고통에 시달린 만큼 다른 사람의 고통을 더 잘 보고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되거나 내가 겪은 고통이 너무 처절하고 슬퍼서 다른 사람의 고통은 보이지 않거나 별거 아닌 것처럼 느끼게 되거나.
가난이든 고통이든 슬픔이든 오래 시달린 사람은 시야도 마음도 좁아질대로 좁아져서 질투의 자장에서 벗어나기가 쉽지 않다.
창작하는 사람들은 더더욱 질투에 휘둘리게 된다. 창작이란 것은 새로운 세계를 만들어 내는 일이고, 새로운 세계는 그 세계를 향유하는 사람이 있어야 완성된다. 창작자는 내 세계의 시민을 단 한명이라도 확보하기 위해 애를 쓰게 되고 실제 세계의 유한한 인류 속에서 내 영역을 확장하기 위해서 경쟁할 수밖에 없는 처지로 내몰린다. 물론 협력이라는 선택지가 있지만 창작이라는 것의 본질은 자신의 고유함을 증명해내야 하기에 협력보다는 경쟁의 영향력 아래 놓이기 쉬운 것이다.
그리고 경쟁은 강한 동기부여를 위해 화력 좋은 질투라는 연료를 사용하기 마련이다. 질투가 화력이 좋기는 하지만 그만큼 화상을 입기도 쉽다. 질투에 사로잡혀 자신의 중심을 잃고 허망한 따라잡기에 능력을 소진해버리기도 한다. 또한 연료를 아무리 집어넣어도 한계는 있기 마련이고 질투라는 화력 좋은 원료는 ‘질투의 대상’이라는 물을 끓여 증발시키거나(발전적으로 극복하여 벗어나기), 압도적으로 끼얹음을 당해 스스로의 불씨를 꺼뜨리게 될 수 있다(자괴감에 사로잡혀 포기하기).
향유자도 경쟁자도 협력자도 없이 홀로 초연하게 창작에 매진할 수도 있다. 동굴에서 홀로 벽에 그림을 그렸던 석기시대의 창작자는 향유자 없이도 아름다운 들소를 그리고 만족했으리라. 하지만 이후 세대가 그것을 발견함으로써 그 그림은 예술이 되었고, 발견되어 향유되지 않은 수많은 들소 그림은 존재하지 않음과 마찬가지가 되어버렸다. 그런 선택의 영역을 제외한다면, 창작자들은 질투를 잘 다루어 더 만족스러운 단계로 나아가거나 질투를 내려놓고 은근하지만 더 오래가는 연료를 찾아야 한다.
창작 자체의 즐거움에 만족하거나(다른 창작자들의 성공으로 그 즐거움을 잃어버리고), 질투를 긍정적인 경쟁 놀이로 만들어 고자극의 성장 동력을 얻거나(누가 땅을 사서 복통이 오거나), 협력의 영역을 넓혀서 서로가 서로의 토양이자 향유자이며 지지자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물론 이 세 가지를 모두 섞어 쓰는 것이 제일 좋으며, 협력의 영역을 넓히는 방법으로 작가라면 작가노조에 가입해보는 것은 어떨까. 그리고 서울고용노동청은 작가노조의 설립신고 처리를 조속히 완료하라.
/이원석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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