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원 월드컵짬뽕
홍합 베이스에 가리비·오징어 쏠쏠
깔끔한 국물·적절히 간이 밴 면발
‘스타’ 없지만 ‘스위스 축구’ 같은 조화
월드컵경기장 뷰… 축구팬들 와볼만
후텁지근하다. 짬뽕 먹기 딱 좋은 날씨다. 이 계절에 짬뽕 한 그릇 뚝딱 하면 땀을 한 바가지 쏟을 수 있으니 이보다 좋은 다이어트 음식이 없다. 생각을 바꾸면 삶이 유쾌해진다.
아침에 일어나면 습관적으로 휴대폰을 켜고 간밤의 월드컵 경기 결과부터 챙겨본다. 불혹의 메시가 그라운드를 휘젓고, 괴물인지 인간이지 구분이 안 가는 음바페와 홀란이 골을 터뜨리는 장면을 되돌려보며 감탄을 내뱉으면서도 이내 가슴 한켠이 시리다. 공허하고 슬프다. 그러다 또 화가 난다. 한국 축구에 대한 분개가 아직 사그라들지 않은 탓이다. 이제 그러지 않을 때도 됐지만, 생각을 바꾸면 삶이 유쾌해지리라 굳게 믿고 있지만 좀처럼 생각이 바뀌지 않는다.
평소 축구보다 야구를 더 즐겨본다. 한낱 야구팬의 마음도 이럴진대 축구팬들의 상심은 얼마나 크겠나. 그렇지만 스포츠에 환희만 있을 순 없다. 패배와 실망, 분노도 공존한다. 좌절도 스포츠가 가진 매력 중 하나다. 이를 딛고 이겨내는 과정 또한 스포츠에서 얻을 수 있는 교훈이다. 한국 축구가 어두운 터널에 진입한 이상, 이제는 출구에 도달하기까지 전조등을 켜고 더 집중해야 할 시기다.
동네의 한 유명 프랜차이즈 커피전문점을 찾았다. 포스터 속 손흥민이 환히 웃고 있다. 손흥민에게 이번 월드컵에 대해 묻는다면 아마 이런 말을 하지 않을까. “웃기는 짬뽕이오.”
■월드컵의 한(恨), 짬뽕으로 승화
기분 전환에는 짬뽕만한 게 없다. 월드컵으로 받은 상처를 월드컵으로 치유하기 위해 수원시 우만동 ‘월드컵짬뽕’을 찾았다. 수원월드컵경기장 길 건너편에 위치한 곳이다. 가게 이름 대로면 4년에 한 번 특수를 누려야 하는 곳이지만, 이번 월드컵의 여파 탓인지 한산했다. 한국 축구는 상인들마저도 한숨짓게 했다.
수원월드컵경기장은 날개를 형상화한 디자인에서 착안, ‘빅버드(Big Bird)’라는 이름이 붙었다. 2002 한일 월드컵 이후 현재까지 수원삼성블루윙즈의 홈구장으로 사용되고 있다. 이곳에서 24년 전 월드컵 자원봉사자로 관중석에서 안내를 도맡았다. 월드컵 개막 직전 한국과 프랑스의 평가전 때부터 임무를 시작했다. 1998 프랑스 월드컵 우승의 주역인 지단과 앙리, 트레제게 등을 당시 실제로 보며 입이 쩍 벌어졌던 스무 살 청년은 이제 짬뽕을 먹기 위해 입을 쩍 벌리는 영포티가 됐다.
매장 곳곳에 냉면과 콩국수, 막국수를 판매한다는 전단이 붙어 있다. 실망이다. 콩국수나 막국수를 폄훼하는 건 아니다. 여름철 한시적인 메뉴겠지만, 짬뽕과 결을 달리하는 음식들을 전면에 내세우는 건 짬뽕집의 근간을 뒤흔드는 일이다. 추어탕집에서 돈까스를, 주꾸미 전문점에서 코다리를 앞세우는 것이나 다를 바 없다.
신태용 전 감독과 유튜버 리춘수(이천수)의 싸인도 벽면에 걸려 있다. 짬뽕 종류로는 차돌·삼선짬뽕 외에 백짬뽕, 불짬뽕이 있다. 잡다한 메뉴 구성에 살짝 실망했던 바, 이 집의 근본을 확인해야겠다는 생각에 기본 짬뽕을 주문했다. 일반 짬뽕 이름이 이곳에선 월드컵짬뽕이다.
■화려하진 않지만 한결같은 맛
홍합 베이스의 짬뽕이다. 가리비와 오징어도 쏠쏠하게 들어 있다. 양파와 당근, 숙주나물, 목이버섯이 곁들여져 달달한 맛을 내는 동시에 식감도 높인다. 먹을 땐 맵다는 느낌이 없었는데 먹다 보면 어느샌가 매운맛이 치고 올라온다. 은근히 맵다. 맵찔이의 경우 일반 짬뽕이 쉽지 않을 수 있으니 백짬뽕을 택하는 게 좋겠다.
국물은 군더더기 없이 깔끔하다. 자극적이지 않다. 면발에도 적절히 간이 배어 있어 겉돌지 않는다. 화려한 맛은 아니지만 기본은 갖추고 있는 짬뽕이다. 축구로 치면 스위스 정도의 느낌이랄까. 특출난 선수에게 의지하는 방식이 아닌 전체적인 팀워크로 승부를 보는 스타일이다. 근본이 있다.
주인장이 양념을 비롯해 레시피를 직접 만들고 조리 방법과 계량까지 설정해 매뉴얼을 만들어 놨다고 한다. 그래서 주인장이 없을 때도 주인장이 만든 것과 똑같은 맛을 낼 수 있다고 이 집 종업원은 설명했다. 언제든 맛이 일정하다는 게 이 집만의 강점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양념의 비법에 대해선 정확히 알지 못한다고 했다. 며느리도 모르는 걸 알아내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뷰도 장점이다. 짬뽕을 먹으며 수원월드컵경기장을 바라볼 수 있는 자체로 좋다. 스포츠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공감한다. 경기장 근처에만 가도 도파민이 솟구친다. 뭘 먹는다 한들 맛이 없을 수 없다. 야구장이든 축구장이든 마찬가지다.
후배와 함께 짬뽕 한 그릇씩을 먹고 미니탕수육까지 추가했더니 영수증에 3만2천원이 찍혔다. ‘32,000’이라는 숫자를 보니 32강 탈락의 악몽이 불현듯 다시 떠오른다. 이번 월드컵으로 인한 마상(마음의 상처)이 치유되기까지는 아직 시간이 더 필요해 보인다.
/황성규기자 homerun@kyeongi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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