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9년 북해 흐로닝언에서 천연가스가 터졌을 때, 네덜란드는 전 세계의 부러움을 샀다. 자원 외화벌이로 순식간에 국가재정이 넘쳐났다. 하지만 ‘축배’는 얼마 못 가 ‘독배’로 바뀌었다. 석유산업 종사자의 지갑은 두둑해졌지만 물가 역시 가파르게 뛰었다. 자국 통화 가치가 치솟으면서 공장의 기계는 하나둘 멈춰 섰다. 돈은 넘쳐나는데 일자리는 증발했다. ‘쉽게 번 돈’에 취해 산업의 기초체력인 제조업을 방치한 대가는 혹독했다. 풍요의 역설은 ‘네덜란드병(Dutch Disease)’이라 불린다.

한국 경제에도 ‘네덜란드병’의 불길한 그림자가 어른거린다. 반도체 호황 속에 지난 5월 경상수지는 사상 최대치인 386억1천만 달러 흑자를 올렸다. 장기간 정체됐던 ‘1인당 GDP(국내총생산) 3만 달러’ 박스권 탈출의 희망이 보인다. 원·달러 환율이 연평균 1천456.1원 밑으로 내려간다면, 4만 달러 진입도 가능하다는 계산이다.

하지만 화려한 지표 뒤에는 냉혹한 현실이 있다. 대학 졸업장이 있는 50만 명이 일자리를 찾지 못하고 있다. 이 중 64.2%가 20·30대 청년이라는 사실은 치명적이다. 아예 취업 경험이 없는 실업자도 5만6천 명에 달한다. AI(인공지능)의 고용시장 잠식으로 기업들의 신입 채용은 씨가 말랐고, ‘중고 신입’도 취업문을 열기 어려운 처지다. 단 6%의 AI 침투에도 고용 절벽이 가시화되는 마당에, 도입률이 50%에 달할 10년 뒤에는 어떤 파국이 닥칠지 예측조차 어렵다.

‘AI 광풍’은 대학 입시 선호학과 순위도 뒤집어놨다. 반도체 계약학과가 20년 넘게 이어진 ‘의대 열풍’도 밀어낼 기세다. 고소득과 안정성에 매달리는 것은 개인의 선호 때문이 아니라, 불안감이 만들어낸 사회적 병리현상이다. 쏠림이 만드는 양극화가 사회의 허리를 끊어놓을까 걱정이다.

‘네덜란드병’은 ‘준비되지 않은 풍요’와 ‘단일 산업 쏠림’의 씁쓸한 결말을 보여준다. 지금 우리 사회가 경계해야 할 것은 고용의 균열과 제조업의 해체다. 반도체라는 외줄타기에서 삐끗하는 순간, 경제를 받쳐줄 안전망은 결국 탄탄한 제조업과 다원화된 산업 생태계다. 균형을 상실한 경제는 작은 충격에도 뿌리째 휘청인다. 네덜란드가 가스전의 단맛에 취해 제조업의 골간을 잃고 눈물 흘렸듯 한국도 ‘반도체 흑자’와 ‘AI 신화’라는 달콤함에만 취해 있다면, 더 혹독한 청구서가 날아올 수 있다. 네덜란드병의 경고는 이미 시작됐다.

/강희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