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사·고려도경에 등장 ‘왕골 돗자리’ 명성
원나라·일본에 전해진 고려 대표 특산품
왕골 재배 농가 급감… 고령 장인들 명맥이어
전통산업 보전 위한 체계적 지원 대책 시급
지난 25일 오전 6시30분 강화군 송해면 당산리 들판. 한운수(79)·추순임(73) 부부의 비닐하우스 논에서 왕골 수확 작업이 한창이었다. 동네사람 몇이 나와서 거들었는데 대부분 노인이었다. 부인 추순임씨는 왕골로 돗자리나 생활용기를 만드는 강화군 완초공예 명장이다.
이 동네는 몇십 년 전까지만 해도 집집마다 왕골을 심고 화문석을 짰다. 이제는 한씨 부부를 비롯해 그야말로 몇 집 남지 않았다. 일은 고되고, 벌이는 시원치 않다 보니 젊은 사람들이 하려 들지 않는다. 강화 화문석의 명맥이 언제 끊길지 모르는 지경에 이르렀다.
왕골은 3월 중하순 못자리에 모를 붓고 5월 초에 내는데, 4~5뿌리를 한 포기로 심는 볏모와는 달리 한 대씩을 심는다. 그 한 대가 새끼를 쳐 5~8대로 한 포기를 이루어 자란다. 7월이면 2~3m 높이까지 큰다. 요새는 주로 비닐하우스에서 재배하는데, 뿌리 쪽 하얀 부분의 검은 점 오염을 막기 위해서라고 일을 돕던 김완식(79) 송해면 노인회장이 말했다.
벼베기처럼 낫으로 벨 것으로 생각했는데, 맨손으로 한 대씩 뽑았다. 이를 ‘왕골 댄다’고 표현했다. 남자들이 뽑고, 비닐하우스 밖으로 빼내면 여자들은 그걸 받아 위아래를 잘라내고 가지런히 다듬었다.
논에서 수확한 왕골을 단으로 묶어 집 창고에 가져오면 3인 1조가 되어 왕골 한 대를 세 가닥으로 쪼개는 작업을 하고, 그걸 한 움큼씩 묶어 뿌리쪽이 위로 가도록 건조장에 거꾸로 매달아 말린다. 이 작업이 끝나면 왕골의 녹색 부분까지 새하얗게 변한다. 요새는 전기로 온도를 높여 건조하지만 예전에는 연탄을 때고 유황까지 피워가면서 했기에 여간 고역이 아니었다. 이렇게 말리고, 색을 바랜 왕골을 이용해 자리도 매고, 각종 생활 용기도 만든다.
추순임 명장의 솜씨는 이미 전국에 이름이 났다. 서울의 한 유명 호텔이 폐백실에 깔기 위해 추 명장을 찾아 작품을 주문했을 정도다.
강화의 손꼽히는 특산품인 화문석은 고려시대에도 국가대표 특산품이었다. 강화에서 개성으로 다시 도읍을 옮긴 지 9년이 흐른 1279년 3월 ‘고려사절요’에 보면, ‘화문석(花紋席)을 원나라에 바쳤다’는 기록이 있다. 고려의 항복을 받아낸 원나라에서 화문석을 요구했기 때문일 터. 그 화문석의 크기가 무척 컸던 모양인데, ‘고려사’는 원나라에 보낸 그 화문석을 ‘화문대석(花文大席)으로 표기했다. 화문석을 조공(朝貢)으로 요구한 이유는 원나라, 즉 몽골군이 고려를 침략한 이후 줄곧 보아 온 화문석의 쓰임새와 예스럽고 소박한 아름다움에 반했기 때문이리라.
이미 여몽전쟁 이전, 송나라 사신으로 왔던 서긍도 고려의 화문석을 칭찬해 마지않았다. 서긍은 ‘고려도경’에서 ‘(침상에) 큰 자리[大席]가 깔려 있는데, 이 왕골 돗자리는 편안하여 오랑캐 풍속이라는 느낌이 들지 않을 정도’라고 했다. 서긍은 왕골 돗자리를 ‘완점(莞簟)’이라고 썼다.
서긍이 왕골 돗자리를 ‘완점(莞簟)’으로 표기했다면, 우리 ‘삼국사기’에는 ‘완석(莞席)’으로 돼 있다. 요새 우리는 보통 ‘완초(莞草)’라 한다.
서긍은 또 ‘고려도경’에서 ‘문석(文席, 무늬 있는 돗자리)’을 따로 설명하고 있다.
‘문석은 고운 것과 거친 것에 차등을 둔다. 정교한 것은 침상에 깔고, 거친 것은 땅을 덮는 데 쓴다. 짜는 데 쓰는 풀은 부드러워서 접거나 굽혀도 망가지지 않는다. 흑·백 두 색을 서로 섞어 무늬를 만들고, 푸른색과 자주색으로 테두리를 감싸는데 규정된 모양은 원래 없다.’
삼국시대 이전부터 우리나라에서 만들어 사용했을 이 화문석은 예전에는 강화, 교동뿐만 아니라 전국 여러 곳에서 생산했다. 고려시대에는 화문석을 일본에 외교 선물로 보낸 적도 있다. 조선에서도 고려와 마찬가지로 돗자리 만드는 장인, 즉 석장(席匠)을 따로 두어 관리하기도 했다.
왕골 돗자리는 무늬를 놓은 화문석, 그렇지 않은 백문석(白紋席)으로 구분할 수 있다. 어떤 이는 무늬 있는 화문석보다 무늬 없는 돗자리 만들기가 더 지루해서 힘들기 때문에 가격이 비싸다고 하는데, 실제로는 그렇지가 않다. 무늬 없는 돗자리에 들어가는 왕골 재료를 구하기가 어려워 만들기가 쉽지 않다고 한다. 무늬 없는 돗자리에 쓰는 왕골 재료에는 어떤 흠도 있어서는 안 된다고 한다. 작은 흠 같은 것은 짙은 무늬에 넣으면 숨길 수 있는데 무늬 없는 것에는 그렇게 할 수 없기 때문이라는 얘기다.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은 ‘화문석(花紋席)’을 풀이하면서 ‘강화도에서 만든 것이 유명하다’고 덧붙여 놓았다. 국어사전에 나와 있는 이 설명이 오래 유지될 수 있도록 강화 왕골 산업의 명맥이 끊기지 않을 근본 대책이 절실해 보인다.
/정진오기자 schild@kyeongi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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