케이트 쇼팽의 장편소설 ‘각성’
출간 당시 비난·외면 받은 주인공
시원시원 태도는 용기와 자아감
거리감 느꼈었지만 매듭 푼 기분
나는 같은 장소에 머물면서, 그곳을 완전히 다른 장소로 바꾸어 버릴 수 있는 손쉬운 마법을 알고 있다. 바로 잠을 자는 것이다. 예를 들어 도서관에서의 낮잠. 도서관은 폭염을 피하기 위해 여름에 특히 인기가 많은 장소다. 용케 한 귀퉁이를 차지하고, 이 행운을 보답하기 위해 맹렬하게 읽고 쓰려 하지만 어느덧 잠이 쏟아진다. 나는 팔로 턱을 고이고 책을 읽는 척 끄덕끄덕 졸다가, 완전히 잠 속으로 침몰한다. 그렇게 한숨 자고 일어나면 눈앞의 공간은 전혀 다른 느낌이 든다. 실제로 주변 사람 일부도 바뀌었다. 새로운 기분으로 읽다 만 책을 펼쳐들었다.
내가 고른 책은 19세기 여성작가 케이트 쇼팽의 장편 ‘각성’이었다. 한숨 자고 일어난 활력을 더해 마지막까지 몰입해 읽었다. 덮으면서 작게 한숨이 나왔다. 뛰어난 작가가 얼마나 많은지! 이번 생에 미처 모르고 놓칠 걸작들은 얼마나 많을까? 이 책을 발견한 건 순전히 우연이었다. 도서관 서가를 걸어 다니며 책등을 톡톡 치다 한권을 뽑아 앞 문장을 읽어 보며 책을 고르는 것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발굴’ 방법이다. 솔직히 말해 책 읽는 시간만큼이나 책 고르는 시간, 책장에 선 채 몇 줄을 읽는 시간을 좋아한다. 일종의 낚시 같기도 하고 그렇게 고른 책들은 선물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아무튼 이 책을 읽으면서 여러 생각들로 붐비기 시작했다.
일단 눈에 들어오는 것은 엄청난 필력. 군더더기 없으면서도 아름답게 숨 쉬는 문장들. 자연과 내면의 묘사가 생기 있고 풍성하다. 소설이 얼마나 살아있는 유기체 같은 것인지 새삼 맛보게 해주었다. 한편으로 19세기 여성 소설이 왜 이렇게 섬세하고 미학적인 쪽으로 발달해왔는지 문득 알 것 같았다. 주인공은 제한된 조건에 갇혀있다. 그를 둘러싼 세계를 쓰다보면 폐쇄된 환경과 생기를 앗아가는 사회적 공간부터 살펴봐야 하는데, 벽 자체가 너무 두껍다 보니 그것을 파악할 즈음 책 한 권이 끝나있다. 그 사이 인물은 안으로, 안으로 파고들어 섬세해지는 것이다. 그 결과 문학적으로는 세공이 높은 소설이 된다. 반면에 ‘선 굵은’ 소설이 나오는 것은 쉽지 않다. 주인공이 내적 모험 외에 누려볼 수 있는 선택지가 적기 때문이다.
이 소설의 주인공 에드나는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리나’를 떠올리게 하는 면이 있었다. 사랑을 통해 자기 인생을 새로운 눈으로 바라보면서 허위를 인식한다는 점에서. 출간 당시 주인공이 모성이 없고 도덕적이지 않다는 이유로 비난과 외면을 받았다는데, 그야말로 작품을 피상적으로만 보는 것이다. 에드나가 ‘건드려진 것’은 관능을 통해 사유의 세계로, 자기 자신의 작업으로 나아가는 과정이었는데 그것도 충분히 설득력이 있었다. 인간이 진정으로 가장 깊은 내면, 속마음까지 건드려지는 계기가 사랑과 증오 말고 뭐가 있단 말인가! 기왕이면 증오보다 사랑이 낫지 않은가? ‘사랑을 사용하는 방식’이 자기 삶을 직시하는 것이라면 그때는 감정일 뿐만 아니라 생각이자 행동으로 번져 나간다.
에드나가 되찾은 것은 활기나 생기, 본질적인 면들을 꿰뚫어보는 시선, 시원시원한 태도, 용기와 자신감이다. 정확히는 자아감이다. 이것이 비극으로 끝난다해도 그녀는 작품 안에서 점점 더 강해지고 일반적 삶과는 멀어진다.
예전에는 이런 소설에 거리감을 느껴왔다. 좁고 폐쇄적이라는 이유로, 나는 모험을 하는 소설이 좋은데 모험의 규모가 너무 작다는 이유로, 무엇보다 책 속의 여성들에 비해 나는 나 자신이 충분히 여성으로 느껴지지 않았다. 책 속으로 들어갈 때는 젠더가 희미해지는데 몰입해 읽는 독자는 유령과도 같은 상태이기 때문이다. 유령에게 꼭 성별이 있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그러나 이번 독서를 계기로 ‘말로 하면 당연하지만 나로서는 잘 풀리지 않았던’ 매듭을 푼 느낌이 들었다.
도서관 밖에는 파란 하늘에 하얀 구름 한 덩이가 크림처럼 부풀어 있었다. 배낭을 메고 나오면서 인생이 생생하게 느껴질 때의 기쁨을, 책과 세상과 내가 어떤 식으로든 연결되어 있다는 기쁨을 느끼며 여름의 복판으로 걸어갔다.
/김성중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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