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홍진 감독의 처절한 생존 영화
지구 고립된 우리와 뭐가 다를까
기후위기 청구서 맞짱 뜨는 얘기
어느 여름보다 절실하게 느껴져
덥다. 더워도 너무 덥다. 경남 양산 42.5도. 122년 기상관측 역사상 최고치란다. 이 최고치는 경남 양산만의 것이 아니다. 프랑스 지롱드, 스페인 아빌라, 미국 네브래스카, 코트디부아르 아비장, 인도 아삼주 등등. 올 여름 극한 폭염과 폭우, 홍수와 산불로 신음하는 세계는 깊고 넓게 퍼져 있다. 모두가 알면서도 외면했던 기후위기 청구서가 전 세계 우편함에 동시에 도착한 느낌이라고 할까?
청구서가 도착한 날에도 양산씨는 폭염 속 배달 오토바이를 타고, 지롱드씨는 잿빛 하늘 아래 밭으로 향하며, 네브라씨는 선크림을 잔뜩 바르고 건설 현장으로 향한다. 재난 서사의 1원칙, 비극은 일상에서 싹튼다. 일상에서 척척 해왔던 일들이 날씨라는 변수를 만나 불안한 사건의 징후가 되고, 기후 변화에 적응하지 못하는 몸 어디선가에서 이상 신호가 켜진다. 대부분의 재난 이야기는 이 이상 징후와 경고를 무시하는 안일함에서 시작되는데…. 매일 쏟아지는 글로벌 기후 재난 뉴스들과 물폭탄이 휩쓸고 간 뒤 열돔에 갇힌 한반도의 현실을 씨줄과 날줄로 엮다보면 블록버스터 재난영화의 프롤로그 신이 뚝딱 나온다.
가령 이런 느낌으로 시작하는 신들.
S#1. 프랑스 지롱드 & 스페인 아빌라
태양을 덮은 검은 잿가루가 쏟아지는 하늘. 평생 숲을 지켜온 지롱드씨가 화마가 삼켜버린 포도밭 앞에 무릎을 꿇고 있다.
S#2. 코트디부아르 아비장
거대한 물폭탄이 쏟아지는 가운데 판자촌과 도심 도로를 휩쓰는 거친 탁류. 지붕 끝에 위태롭게 피신한 아비장씨 가족이 범람하는 흙탕물을 공포에 질린 눈으로 내려다본다.
S#3. 미국 네브래스카주
독립기념일 연휴, 축제로 들떠야 할 거리가 죽음의 도시처럼 텅 비어 있다. 타들어 가는 옥수수밭, 온도계는 화씨 112도(섭씨 44.4도)를 향하고 있다.
S#4. 인도 아삼주
브라마푸트라강의 제방이 붕괴하고 집채 만한 흙탕물 해일이 차밭을 집어삼키며 맹렬하게 덮쳐온다. 아삼씨는 어린 딸을 업은 채 급류와 떠내려오는 잔해들을 피해 필사적으로 달린다.
S#5. 아르헨티나 파타고니아
에푸옌 원시림을 집어삼킨 화염. 불붙은 나뭇가지들이 비수처럼 날아드는 가운데, 파타고니아씨가 검게 그을린 얼굴로 반려견을 안고 화염에 휩싸인 숲길을 미친 듯이 내달린다.
S#6. 대한민국 서울
40도의 살인적 열돔, 아지랑이 끓는 아스팔트 위 퍼져버린 오토바이. 헬멧을 벗은 서울씨가 땀 범벅이 된 핏발 선 얼굴로 배달통을 움켜쥔 채 달동네 계단을 기어오른다.
폭우가 내린 지 일주일 만에 폭염이 찾아오고 대륙 반대편에선 산불과 대홍수가 동시에 발생하는 현상. 임계점을 향해 달려가는 지구에 보내는 외계인의 긴박한 경고이자 붕괴의 전조처럼 느껴지는 것은 왜일까? 지난 주말 나홍진 감독의 ‘HOPE’를 봤다. 고립된 항구마을 ‘호포항’에 나타난 미지의 존재. 그 압도적인 움직임 속에서 평범한 사람들의 일상은 일순간에 처절한 생존 사투로 변한다. 호포항 주민들을 덮친 불가해한 재난이 올 여름 전 지구를 위협하는 자연 재난의 모습과 겹쳐 보이는 것은 이 가혹한 징후들이 우리의 일상을 어떻게 흔들어놓을지 가늠할 수 없기 때문이다.
우주라는 짙은 어둠 속, ‘지구’라는 닫힌 구에 고립된 우리가 호포항의 주민들과 무엇이 다를까? 첨단 기상 예측 시스템을 비웃으며 쏟아지는 물폭탄과 인간의 체온을 넘어서는 폭염 앞에서 더러운 연료 시스템을 근간으로 한 세계 경제가 쌓아 올린 얄팍한 방벽들의 무력함, 그 무력함과 무지에서 오는 공포와 혼돈,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항하고 분투하고 쓰러지고 일어서는 주인공의 모습을 상상하게 된다.
감독은 미지의 재난에 대항하는 호포항의 서사에 ‘HOPE(희망)’라는 반어적인 제목을 달았다. 과연 펄펄 끓는 지구에서 만들어갈 ‘호프’란 무엇일까? 실질적이고 절망적인 기후 재난의 위협에 맞서는 주인공들의 분투기에 좀 더 애정과 관심을 가져야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기후위기 청구서에 진지한 맞짱을 뜨는 이야기가 그 어느 때보다 절실하게 느껴지는 여름이다. 오늘도 지독하게 덥다.
/오형일 KBS 드라마P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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