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무 없는 출장에 배우자 동행
왜 가야했나, 그때 꼭 필요했나
심사 의무화하고 성과보고해야
공직자 특혜가 아닌 ‘행정행위’
고위공직자가 손에 쥔 해외출장 항공권은 단순한 이동권이 아니다. 그것은 국민이 맡긴 권한과 예산을 어디에, 왜, 얼마나 정당하게 사용했는지를 묻는 공적 증서다. 국가를 위해 반드시 가야 할 길이라면 그 표는 국익을 향한 책임의 표가 된다. 그러나 명확한 공무 없이 배우자까지 동행하고 비용마저 세금으로 처리한다면 그 순간 항공권은 특권의 영수증으로 바뀐다.
세금은 정부 금고에서 저절로 생겨난 돈이 아니다. 새벽 첫차를 타고 일터로 향한 노동자의 하루, 한겨울 난방을 줄인 노인의 생활비, 폐업을 걱정하면서도 세금을 낸 자영업자의 한숨이 모여 국가 예산이 된다. 자녀의 등록금과 병원비를 먼저 계산하느라 평생 여권 한 번 꺼내 보지 못한 국민도 적지 않다. 그런 국민에게 고위층의 부부 동반 해외출장은 단순한 예산 문제가 아니다. 공직사회가 누구의 희생 위에 서 있는지를 잊었느냐는 배신감의 문제다.
해외출장의 정당성은 직급이나 명예에서 나오지 않는다. 현지에서 수행해야 할 불가피한 업무가 있는지, 국내에서 대체할 수 없는지, 투입된 비용에 상응하는 공익이 있는지에 따라 판단되어야 한다. 배우자 동행은 더욱 엄격해야 한다. 배우자에게 공식 초청과 독립된 공적 임무가 없다면 동행 비용은 사비로 부담하는 것이 상식이다. 의전, 관례, 친선이라는 추상적 표현은 국민의 지갑을 열게 하는 법적 근거가 될 수 없다.
이 기준은 장관과 고위공무원에게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다. 지방자치단체장, 국회의원, 지방의회의원, 공공기관 임원도 같은 잣대 앞에 서야 한다. 지역 발전을 명분으로 떠난 연수가 실제로 정책 개선으로 이어졌는지, 방문기관과 면담 내용이 무엇이었는지, 귀국 뒤 어떤 조례와 사업에 반영됐는지 밝혀야 한다. 사진 몇 장과 일정표 한 장으로 성과를 대신하는 출장은 공무라기보다 세금으로 포장한 외유에 가깝다.
이 문제를 어느 정당이나 어느 정부의 흠결로만 보아서는 안 된다. 권력이 바뀔 때마다 비판의 기준이 달라진다면 혈세 통제는 정치적 구호로 전락한다. 전직이든 현직이든, 여당이든 야당이든, 중앙이든 지방이든 동일한 원칙이 적용되어야 한다. 세금 앞의 평등이 무너지면 국민은 예산만이 아니라 국가의 공정성까지 의심하게 된다.
국민은 거창한 설명을 요구하지 않는다. 왜 그 사람이 가야 했는가. 왜 그 시기에 가야 했는가. 왜 배우자가 필요했는가. 누가 비용을 승인했는가. 출장 뒤 무엇이 달라졌는가. 이 다섯 가지 질문에 명료하게 답할 수 없다면, 출장은 시작부터 다시 검토되어야 한다. 공직자가 감당해야 할 것은 비즈니스석의 편안함이 아니라 설명책임의 무게다.
제도도 바뀌어야 한다. 일정 금액 이상의 해외출장과 배우자 동반 출장은 외부위원이 참여하는 사전심사를 의무화하고, 목적·일정·참석자·예산·배우자의 역할을 출국 전에 공개해야 한다. 귀국 뒤에는 실제 집행내역과 성과보고서를 영수증과 함께 공개하고, 사적 일정과 혼합된 비용은 본인이 부담하도록 해야 한다. 허위 사유나 부풀린 의전비가 확인되면 부당 지출액의 환수에 그쳐서는 안 된다. 승인권자와 회계책임자에게도 공동책임을 묻고, 고의성이 드러날 경우 징계와 수사의뢰가 뒤따라야 한다.
앞으로의 법적 통제는 ‘공적 필요성’, ‘비용의 비례성’, ‘절차의 투명성’, ‘사후 책임성’이라는 네 기준을 중심으로 설계할 필요가 있다. 관행이라는 이름으로 허용해 온 회색지대를 규정과 법률로 좁혀야 한다. 공직자의 해외출장은 특혜가 아니라 검증받아야 할 행정행위이며 국민의 세금은 지위가 높은 사람에게 더 느슨하게 적용되는 돈이 아니다.
비행기에 오르기 전 공직자는 좌석번호보다 먼저 국민의 얼굴을 떠올려야 한다. 그 표 한 장이 누군가에게는 한 달 생활비이고, 한 번도 떠나 보지 못한 여행이며, 아파도 미뤄 둔 치료비일 수 있다. 국가를 위한 길이라면 떳떳하게 떠나라. 그러나 가족과 함께 누리고 싶은 여행이라면 자기 돈으로 가라. 국민의 혈세는 지도층의 쌈짓돈이 아니다. 그 비행기 표에는, 말없이 세금을 낸 국민의 땀과 눈물이 묻어 있다.
/이인곤 前 호서대학교 법경찰행정학과 교수·법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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