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도 찾던 고려 종이, 대표 수출품 자리매김

강도시기 팔만대장경·금속활자 함께 수요급증

강화산닥나무, 고려 인쇄문화 잇는 역사적 자산

남해 산닥나무 천연기념물… 강화는 보존 시급

강화군 내가면에 자생하고 있는 강화산닥나무. 강화산닥나무 실물을 확인하기 위해 지난 2월부터 6개월을 기다렸다. 여러 차례 갔으나 뚜렷하게 구분하지 못하고 계절을 두 번이나 보내고서야 찾을 수 있었다. 나뭇대는 싸리나무처럼 생기기도 하고, 잎사귀는 쥐똥나무와도 닮아 헷갈렸다. 특유의 노란 꽃이 피는 8월까지 기다린 끝에 강화군 내가면 어느 깊은 산길에서 만날 수 있었다. ‘강화도의 나무와 풀’ 저자 강복희 선생의 도움이 컸다. 2026. 8.7 /정진오기자 schild@kyeongin.com
강화군 내가면에 자생하고 있는 강화산닥나무. 강화산닥나무 실물을 확인하기 위해 지난 2월부터 6개월을 기다렸다. 여러 차례 갔으나 뚜렷하게 구분하지 못하고 계절을 두 번이나 보내고서야 찾을 수 있었다. 나뭇대는 싸리나무처럼 생기기도 하고, 잎사귀는 쥐똥나무와도 닮아 헷갈렸다. 특유의 노란 꽃이 피는 8월까지 기다린 끝에 강화군 내가면 어느 깊은 산길에서 만날 수 있었다. ‘강화도의 나무와 풀’ 저자 강복희 선생의 도움이 컸다. 2026. 8.7 /정진오기자 schild@kyeongin.com

우리나라 최초의 K-컬처 수출품은 무엇일까. 문화 상품으로는 단연 고려 종이를 꼽을 수 있다. 고려에서 만든 종이, 고려지(高麗紙)는 외국에서 찾는 ‘Made in Korea’의 원조였다. 고려 종이가 얼마나 우수했는지, 종이 발명국 중국에서조차 고려에서 만든 ‘Made in Korea’를 찾았다.

고려 종이는 특히 강도(江都) 시기에 많이 쓰였다. 개성에서 수도를 옮겨 온 강화도에서는 팔만대장경의 경판을 만들고, 금속 활자까지 만들어 냈다. 이들 목판과 금속 활자는 모두 종이책 발간을 염두에 둔 것들이었다. 그러니 그때 강화에서의 종이 수요는 가히 폭발적이었을 테다.

우리나라 종이, 한지(韓紙)의 국제적 명성은 이미 삼국시대부터 자자했다. 고구려의 승려 담징은 일본에 종이 제조법을 알렸으며, 신라에서 만든 종이는 당나라 문사(文士)들을 매료시켰다. 신라의 종이는 하얗고 매끈하다고 해서 백추지(白硾紙)라고도 했으며, 신라의 다른 이름을 붙여 계림지(鷄林紙)라 하기도 했다. 책자 발간이 많았던 백제의 제지 기술 또한 남달랐다.

고구려, 백제, 신라를 계승한 고려의 종이 만드는 기술은 한층 정교해졌다. 정부에서는 지소(紙所)라는 종이 제작소를 별도로 두었다. 생산량도 늘었다. 그 고려 종이는 대량 수출 품목에 올랐다.

내수용 종이 전문 시장도 별도로 있었다. 이를 저시(楮市)라 했다. 종이 값도 올랐다 내렸다 했다. ‘고려사절요’ 1227년 9월 기록을 보면, 실권자 최우가 종기를 크게 앓았다. 그러자 정부에서 나서 사람들에게 축문을 지어 기도하게 했다. 너도나도 축문을 짓기 위해 종이를 사들이는 바람에 종이가 귀해져 그 가격이 올랐다.

개성에서 강화도로 집단 이주를 해 서로 다투어 집을 지을 때는 종이 값도 크게 올랐을 게 뻔하다. 당시 창문은 유리가 아니라 다 종이로 발랐으니 종이 수요가 폭발적으로 늘었을 테니 말이다.

이규보는 만년에 지은 시에서 창문에 종이 바르는 얘기를 풀어냈다. 1240년, ‘창문이 구멍나 추운 데 앉았다’, ‘창문을 바르다’라는 제목의 두 작품을 잇따라 지었다. 창문이 찢어져 사방에서 얼굴을 에는 찬바람이 들어와 고역이 이만저만 아니었다. 찢어진 창문을 막지 않은 잘못은 다 자신의 게으름 탓이었다고 자책도 했다. 그 찢어진 창문을 바르고는 ‘오늘 비로소 창 구멍을 바르니/이젠 매서운 바람 막게 되었네/신기하네, 한 폭의 종이가/추위 막는 위대한 공이 있구나’라고 읊었다.

병환이 깊은 일흔셋의 이규보가 찬바람 쌩쌩 날아드는 한겨울의 찢어진 창문을 바르지 못한 것은 게을러서가 아니라 종이 살 돈이 없어서였을 게다. 그러다가 어떻게 돈을 융통해 종이를 구해 창문을 발랐다. 이규보의 눈에는 바람을 막아주는 그 종이가 위대하게 보였다.

종이는 아껴 써야 하는 귀한 물건이었다. 이규보가 찢어진 창문을 막은 이야기를 시로 남긴 그 이듬해에 적은 시들에는 종이를 아끼는 마음이 간절하다. ‘끝에 남은 종이가 있기에 또 한 절을 지어 보낸다’거나 ‘종이가 남았기에 또 한 구절을 지어 남쪽으로 놀러 가자는 뜻을 거절하다’는 제목 속에 귀한 종이를 아껴야 하는 이규보의 마음이 그대로 드러난다.

고려에 왔던 송나라 사신 서긍은 ‘고려도경’ ‘특산물[土産]’ 편에서 “종이는 온전히 닥나무[楮]만을 써서 만들지 않고 등나무[藤]를 간간이 섞어 만들되, 다듬이질을 하여 다 매끈하며, 좋고 낮은 것의 몇 등급이 있다”면서 당시 고려에서 만드는 종이 관련 사항을 제법 구체적으로 기록해 놓았다.

강화군 내가면 강화산닥나무군락. 2026.8.7 /정진오기자 schold@kyeongin.com
강화군 내가면 강화산닥나무군락. 2026.8.7 /정진오기자 schold@kyeongin.com

종이의 원재료가 되는 닥나무는 지금 강화도에서는 얼마나 자라고 있을까. 강화도의 닥나무에는 다른 곳과는 달리 특별하게도 ‘강화’라는 지명이 붙어 있다. 강화산닥나무. 이 ‘강화산닥나무’는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에 올라 있다. ‘팥꽃나뭇과의 낙엽 활엽 관목. 높이는 1~1.5미터이며, 잎은 마주나고 달걀 모양의 타원형이다. 7~8월에 노란 꽃이 총상(總狀) 화서로 피고 열매는 긴 타원형으로 9~10월에 익는다. 나무껍질은 종이의 원료로 쓴다. 산과 들에 나는데 인천광역시 강화도와 남쪽 섬에 분포한다’고 설명하고 있다. ‘산닥나무’와 같다는 점도 부연해 놓았다. 산닥나무의 대표 산지는 강화도라는 얘기다.

산닥나무는 그러나 강화도에서는 별달리 보호받지 못하고 있다. 몇몇 곳에 강화산닥나무 군락이 있기는 하나 위태로운 지경이다. 강화산닥나무는 고려시대 강화도에서 화려하게 피어난 출판 인쇄 문화를 따라가게 하는 열쇠 중 하나라는 점에서 보존 가치는 무척 크다고 할 수 있다. 경상남도 남해의 산닥나무 군락은 천연기념물로 지정돼 보호받고 있다.

/정진오기자 schild@kyeongi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