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인일보·모씨네사회적협동조합 공동기획
1945년 미군 촬영 항공 사진 국내 최초 공개
부평 무기공장·경인가도·조선인노동자합숙소
민영환 농장 을사늑약 후 1908년 송병준 강탈
1911년 일본인 매도 후 1923년 日 육군연습장
상공에서 본 눈 덮인 부평 인천육군조병창. 국내에 처음 소개된 이 사진은 미 육군항공단 제20공군 제468폭격전대 소속 사진비행대대가 1945년 1월18일 오전 8시40분부터 9시30분까지 고도 7천924m에서 촬영한 것이다. 굽이치는 산 아래 드넓은 부평 들녘에 즐비하게 들어선 무기 공장들과 거미줄처럼 얽힌 도로, 영등포까지 이어진 경인가도를 한눈에 볼 수 있다. 조병창 인근에는 주택지뿐 아니라 공장지대와 조선인 노동자 합숙소, 논이 바둑판처럼 자리 잡고 있었다.
■ 인천육군조병창, 땅과 공간을 바꾸다
1900년, 민영환은 부평 들녘에서 목양사라는 농장을 운영했다. 을사늑약에 분개한 민영환이 자결한 뒤 1908년 송병준 등이 목양사 부지를 강탈했다. 유족들이 법적 소송으로 대응했으나 역부족이었다. 1911년 일진회 농업회는 구 목양사 부지를 일본인에게 팔아넘겼다. 이 땅은 1923년 2월 조선군사령부 제20사단 용산기지 부대의 일본 육군연습장으로 활용되면서 계절마다 포성이 끊이지 않았다. 이 부평연습장은 주민들의 불만과 불안 속에서도 부지와 건축물까지 계속 확장되었다.
이처럼 공간이 군사 시설로 탈바꿈한 역사적 배경 속에서 일제는 만주 침략(1931년)에 그치지 않고 대륙에서의 전면전을 준비했고, 중일전쟁(1937년)을 일으켰다. 전선은 북중국을 넘어 동남아시아와 태평양까지 이어질 기세였다. 그 사이 일본 내 군수 기업들은 잇따라 부평과 인천항 인근으로 공장을 이전하거나 확장했다. 무기를 만들어 선박에 실어 보내는 것보다 전선에 가까운 곳에서 만드는 편이 빠르고 안전했다.
부평은 1939~1940년 인천항과 주안염전을 비롯해 경성제1비행장(현 김포국제공항)으로 이어지는 산업·교통 요충지였고, 육군연습장까지 있어 새로운 군사 시설이 들어설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1939년 8월9일 일본육군조병창은 육군대신에게 한 장의 서류를 보냈다. 문서 제목은 ‘토지 매수의 건 신청’이었다. 조선에 새 공창을 세워야 하니 부평연습장을 넘겨받고 그 둘레의 땅을 사들이게 해 달라는 내용이었다. 연습장 부지 72만8천여평과 신규 토지 약 43만평을 합하면 총 115만평(380만㎡)이 넘었다.
다음 날 육군성 병기국이 제시한 목적은 만주와 조선, 중국 북부로 가는 수송을 빠르고 안전하게 하고, 조선의 병기 생산 능력을 크게 끌어올리는 것이었다. 생산 목표는 소총 월 2만정, 경기관총과 중기관총 각각 월 100정, 총검 월 2만 자루였다. 가칭 조선공창(工廠)은 본부 건물과 실탄 공장을 같은 부지에 건립할 여지를 남겨 두었다. 첫 삽을 뜨기도 전에 이미 확장이 계획에 포함되어 있었던 셈이다.
■ 인천육군조병창, 계산된 부평의 군사화
군사·중공업벨트 인천조병창 병참기지 토대
1940년 오사치 기사부로 초대청장 임명
美 선교사 인근 27년 거주… 담장 안 몰라
해방 후 美 보고서 조선인 강제노동 언급
‘경인가도’ 선상에서는 인천과 경성의 도시계획, 각종 산업도로의 포장·개설이 추진되었다. 만석동 조선기계제작소와 인천중앙광장을 거쳐 김포공항~여의도비행장(옛 경성제2비행장)~영등포로 이어지는 ‘국방도로’라는 군사 벨트와, 인천항 공업지대~주안염전~부평 공업지대~경성 산업·공업지대로 이어지는 중공업 벨트는 인천육군조병창 건설계획과 맞물려 형성된 일제의 병참 군사화 기반이었다.
이러한 기반 시설 계획 아래 1939년 9월30일 고쿠라 조병창은 부평에 공사감독사무소를 설치하기 위해 직원들의 숙소로 사용할 민가를 대여해 달라는 신청서를 제출했다. 당시 직원들을 위한 별도 숙소가 없었기 때문이다. 감독관들은 부평에서 셋방살이에 들어갔다.
대규모 토목 공사는 1939년 말부터 빠르게 진행되었다. 1940년 12월2일 개창식을 전후해 미·영 연합 정보기관들은 오사치 기사부로(大幸喜三郎·육군소장)가 초대 창장으로 임명되었다는 소식을 사전에 파악하고 있었다. 모씨네 아카이브센터는 영국 국립공문서관에서 발굴한 한 장의 문서에서 명확한 근거를 찾았다.
1940년 12월4일자 비망록(190호)에서 도쿄 주재 영국대사관 육군무관 워드(R. T. Wards) 중령은 영국 군사정보국장에게 ‘조선 진센 육군조병창(Army Arsenal, Jinsen, Korea)’이라는 제목의 문서를 보냈다. 문서에는 “오사치 육군소장이 인천육군조병창장으로 임명되었다”고 적혀 있었으나, 조병창의 위치는 ‘부평’이라고 구체적으로 기재되지 않았다. 이에 워드 중령은 서울 주재 총영사에게 공사관 서기실을 통해 관련 정보를 보내 달라고 요청했다. 이틀 뒤인 12월6일 오후 3시25분, 오사치는 인천역에 도착해 본격적인 업무를 수행했다.
■ 조병창, 담장 안팎
1945년 7월 미 해군 정보국은 ‘조선 제물포 지리 개황’이라는 정보보고서에 1913년부터 1940년까지 제물포와 부평에 살았던 미 감리교 선교사 마거릿 이사벨 헤스(Margaret Isabelle Hess·한국명 혜시·영화초등학교장 겸 영화유치원 설립자)의 증언을 담았다.
“부평역에서 서쪽으로 조금 떨어진 곳에 조병창과 공장들이 있는데, 이 공장들은 조병창으로 분류된다. 그러나 정보원은 공장들을 멀리서 보았을 뿐, 그곳에서 생산되는 제품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한다.”
27년을 살고도 담장 안은 몰랐다는 이야기다. 또 헤스는 “철길 북쪽 부평에 새 비행장이 들어설 예정이라는 말을 들었다.”라고 증언하며 조병창 안의 간이 비행장 건설 계획을 언급했다. 실제 이 비행장은 1946년 미군에 의해 건설되어 운영에 들어갔다.
일반인들은 인천과 서울 소재 일본인 신문 ‘조선신문’과 ‘경성일보’, 조선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 등을 통해 인천육군조병창 관련 기사를 접했겠지만, 정확한 위치는 알지 못한 듯하다. 신문에는 구체적인 지명이나 번지까지 공개되지 않았다. 조병창의 각종 견습직과 노무 요원, 간호부 모집은 경성직업소개소를 통해 이루어졌다. 따라서 내부 직원이 아닌 이상 외부인들은 조병창의 내부 현황이나 건물 등을 파악할 수 없었다.
■ 조병창 확장, 조선인 노동자와 강제노동
확장의 결과물은 해방 직후에 드러났다. 1945년 11월30일 미 제24군단 조사팀의 보고서는 주요 건물 18동의 쓰임새와 넓이, 설비를 하나씩 적어 놓았다. 오늘날 캠프마켓 안팎에 남은 건물의 내력을 따질 때 기준이 되는 자료다.
처음 지어진 소총 공장은 8동이었다. 여기에 1940년대 초 대규모 증축이 더해졌다. 소총 탄약용 4동, 개머리판 가공용 1동, 행정·병원·사무용 3동이 철근 콘크리트로 새로 들어섰다. 겉모습은 그럴듯했으나 자재가 나빠 새 건물인데도 낡은 티가 났다고 조사관은 적었다. 1944년에는 탄피 공장이 완공되었고, 같은 해 부평에 평양육군병기보급창의 분창까지 들어섰다. 만드는 곳과 쌓아 두는 곳이 한자리에 겹친 것이다.
이 큰 공장은 얼마나 생산했을까. 조사팀이 파악한 소총 생산량은 한 달에 6천정 안팎이었다. 공장에서 일한 민간인은 하루 100정을 만들어도 제대로 작동하는 것은 다섯 자루 중 한 자루뿐이었다고 했다. 규모에 견주면 초라한 숫자다. 이유는 기계가 아니라 운영에 있었다. 건물은 공정 순서를 고려하지 않고 흩어져 있었고, 컨베이어도 운반 차량도 없었다. 궤도가 건물 사이를 잇고 있었으나 화차를 미는 일은 전적으로 사람의 힘에 의존했다. 값싼 노동력이 넉넉해 손으로 나르는 방식이 유지된 듯하다고 조사관은 적었다.
노무 관련 출장 기록은 조병창 운영과 확장이 인력에 크게 의존했다는 점을 뒷받침한다. 1941년 9월 인천과 평양제조소의 노무 문제를 다루는 협의회가 열렸고, 곧이어 노무 요원시찰과 새로 뽑은 인원을 인솔하는 출장이 이어졌다. 1943년 12월에는 한 직원이 조선기계제작소에서 조병창으로 옮겨 오는 노동자들을 인수하기 위해 닷새 동안 부평에 머물렀다. 이듬해 9월에는 오사치 초대 창장 후임으로 온 와케 다다후미(和氣忠文·육군소장·육군성 정비국 공정과장) 창장이 직접 조선인 노무자 근로 관리 연구회에 참석했다. 회의의 주제도 출장의 목적도 대부분 사람이었다. 1943년에는 기능자양성소까지 두었다. 확장의 하중은 설비가 아니라 사람에게 실렸다.
■ 미·영 정보국에서 본 인천육군조병창
1945년 4월11일 미 군사정보부(Military Intelligence Division·MID)에서 작성한 ‘군사조사회보 일본정보(Military Research Bulletin Japanese Intelligence)’라는 책자에 병참과 군수 분야를 설명하면서 인천조병창 현황과 평양 병기보급창의 부평·겸이포(현 황해도 송림) 분창 창고를 설명하고 있다. 이 정보를 보면 인천조병창에서 소총, 소·중구경 포병 화기와 박격포 등을 수리 작업했고, 부평 분창은 관측 차량과 예비 부품 운반차, 궤도 차량의 단순 수리 작업을 이어갔다.
같은 해 8월15일 미 군사정보부에서 작성한 ‘군사조사회보 일본정보(Military Research Bulletin Japanese Intelligence)’에 일본육군조병창 현황을 상세하게 설명하고 있는데 고쿠라, 나고야, 오사카 등의 육군조병창 내용이 있다. 같은 정보에서 인천조병창은 소형 무기를 생산하고, 제1제조소(부평)와 제2제조소(평양)에 있었다. 민간 군수공장의 생산에 대한 감독은 인천부 기관, 지역 직원과 공장 검사관을 통해 수행되고 있으며 조선인 노무자와 학생들의 강제노동 등을 언급하고 있다.
/전갑생 모씨네사회적협동조합 수석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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