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찬욱 감독 ‘바다지만 산 이미지 장소’ 찾아

기암괴석·갯벌 품은 ‘하나개해수욕장’ 선정

드라마 ‘천국의 계단’·영화 ‘실미도’에도 등장

인천 영종구 무의도 하나개해수욕장에 썰물로 물이 빠지면서 넓은 갯벌이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영종과 강화 등 인천 갯벌은 멸종위기 조류 등 수많은 생물이 살아가는 터전이다. 2026.9.1 /송윤지기자 ssong@kyeongin.com
인천 영종구 무의도 하나개해수욕장에 썰물로 물이 빠지면서 넓은 갯벌이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영종과 강화 등 인천 갯벌은 멸종위기 조류 등 수많은 생물이 살아가는 터전이다. 2026.9.1 /송윤지기자 ssong@kyeongin.com
‘헤어질 결심’에서 서래(탕웨이)가 바닷가 모래에 자신의 몸을 숨길 구덩이를 파고 있다. /영화 ‘헤어질 결심’ 화면 캡처
‘헤어질 결심’에서 서래(탕웨이)가 바닷가 모래에 자신의 몸을 숨길 구덩이를 파고 있다. /영화 ‘헤어질 결심’ 화면 캡처

인천의 바다는 하루에 두 번 모습을 바꾼다. 파도가 일던 바다에서 물이 빠지면 그 아래 감춰져 있던 광활한 갯벌이 모습을 드러낸다. 사람이 걷던 갯벌은 밀물이 들면 다시 바다가 되고, 그 위에 남은 흔적도 물과 함께 사라진다.

지난 2022년 제75회 칸국제영화제에서 박찬욱 감독에게 감독상을 안긴 영화 ‘헤어질 결심’에서 바다는 주인공 해준(박해일)과 서래(탕웨이)의 사랑이 끝나는 곳인 동시에 두 사람의 관계를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로 남기는 공간이다. 영화의 결말에서 서래는 자신의 죽음을 해준이 영원히 풀지 못할 ‘미결(未決) 사건’으로 만들기 위해 바닷가 모래에 스스로 몸을 묻고, 밀려든 바닷물은 그녀가 있던 자리마저 지운다.

영화에는 인천 영종구 무의도 하나개해수욕장이 중요한 장소로 등장한다. 이곳은 갯벌과 바다, 기암괴석과 산이 한데 겹쳐지는 곳이다. 밀물과 썰물에 따라 육지와 바다의 경계를 바꾸는 인천 바다는 영화가 그려낸 엇갈린 사랑과 끝내 답을 찾지 못하는 ‘미결’의 의미를 형상화한다.

한 장소에서 시간 따라 전혀 다른 풍경 ‘매력’

멸종위기 조류 기착지… 생태적 가치도 우수

■ 밀물과 썰물이 만든 영원한 ‘미결 사건’

영화 ‘헤어질 결심’에서 서래(탕웨이)가 모래에 자신의 몸을 묻기 위해 해변으로 향하고 있다. /영화 ‘헤어질 결심’ 캡처
영화 ‘헤어질 결심’에서 서래(탕웨이)가 모래에 자신의 몸을 묻기 위해 해변으로 향하고 있다. /영화 ‘헤어질 결심’ 캡처

“나는 해준씨의 미결 사건이 되고 싶어서 이포(영화 속 지명)에 갔나 봐요.”

영화 ‘헤어질 결심’은 산에서 추락해 숨진 남성의 사건을 수사하는 형사 해준과 사망자의 아내이자 피의자인 서래가 서로에게 끌리는 이야기다. 해준은 서래가 남편의 죽음에 관여했다는 사실을 알고도 사건을 덮은 뒤, 자신이 그로 인해 “붕괴됐다”고 말하고 떠난다. 뒤늦게 그 말이 사랑의 고백이었음을 깨달은 서래는 해준과 우연히 다시 만나지만 두 사람의 사랑은 끝내 엇갈린다. 결국 서래는 죽음을 통해 해준에게 영원히 풀리지 않을 ‘미결 사건’의 주인공으로 남기로 선택한다.

영화의 마지막 부분에서 서래는 바닷가 모래에 구덩이를 파고 그 안으로 들어간다. 밀물이 차오르면서 서래가 묻힌 자리도 점차 사라진다. 뒤늦게 바닷가에 도착한 해준은 서래를 찾아 헤매지만 그녀가 자신의 발밑에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

영화에서 바다는 두 사람을 갈라놓는 배경에 머물지 않는다. 모래는 서래를 감추고 밀물은 흔적을 지운다. 해준이 서래를 발견하지 못하면서 두 사람의 사랑도 결말을 확인할 수 없는 사건으로 남는다.

영화 주인공 해준(박해일)이 바닷가에서 사라진 서래(탕웨이)를 찾아 헤매고 있다. /영화 ‘헤어질 결심’ 캡처
영화 주인공 해준(박해일)이 바닷가에서 사라진 서래(탕웨이)를 찾아 헤매고 있다. /영화 ‘헤어질 결심’ 캡처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등장하는 바다는 실제 한 장소에 존재하지 않는다. 박찬욱 감독은 동해 삼척 부남해변을 중심으로 서해의 여러 해변에서 촬영한 영상을 합쳐 하나의 바다처럼 보이게 했다. 박 감독은 헤어질 결심 제작 기록 영상을 통해 촬영지를 고를 때 모래사장의 넓이와 폭, 파도의 크기, 낙조를 볼 수 있는지 등을 살폈다고 설명했다. 그가 특히 원한 것은 ‘바다인데도 산의 이미지를 간직한 장소’였다.

인천 하나개해수욕장은 바다와 산의 이미지를 한 공간에 품고 있다. ‘하나개’는 큰 갯벌이라는 뜻으로, 무의도 서쪽을 따라 백사장이 길게 이어지고 그 너머로 너른 갯벌이 펼쳐진다. 해변 한쪽에는 서해가 펼쳐지고, 다른 쪽에는 오랜 세월 파도와 바람이 빚어낸 ‘사자바위’와 ‘원숭이바위’ 등 기암괴석과 함께 호룡곡산이 있다.

박 감독은 영화의 공간을 높은 산에서 바다로, 다시 바닷가의 구덩이로 내려가는 ‘하강 구조’로 설계했다고 한다. 산과 바다가 서로 다른 의미를 상징한다기보다 둘이 합쳐져 영화에선 하나의 세계를 이루도록 했다는 설명이다. 산과 바다, 갯벌과 기암괴석이 한 공간에 겹쳐지는 무의도의 풍경은 이 같은 영화의 공간 구성과 맞닿아 있다.

■ K-콘텐츠가 찾은 풍경, 인천 섬과 바다…

인천 영종구 무의도 하나개해수욕장에 기암괴석이 펼쳐져 있다. 뒤로는 해안을 따라 조성된 해상관광탐방로와 울창한 산이 어우러져 있다. /송윤지기자 ssong@kyeongin.com
인천 영종구 무의도 하나개해수욕장에 기암괴석이 펼쳐져 있다. 뒤로는 해안을 따라 조성된 해상관광탐방로와 울창한 산이 어우러져 있다. /송윤지기자 ssong@kyeongin.com

인천의 갯벌과 해변은 오래전부터 영화와 드라마의 배경이 돼 왔다. 무의도 하나개해수욕장에서는 드라마 ‘천국의 계단’이 촬영됐고, 인근 실미도는 북파공작원 부대의 비극을 그린 영화 ‘실미도’의 무대가 됐다. 2022년 방영된 드라마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에서 우영우(박은빈)와 이준호(강태오)가 서로에게 호감을 확인하는 장면도 실미유원지 해변에서 촬영됐다.

K-콘텐츠가 인천 서해안을 찾는 이유 중 하나는 한 장소에서 시간에 따라 전혀 다른 풍경을 담을 수 있기 때문이다. 로케이션 섭외 등을 지원하는 인천영상위원회 김병구 촬영지원팀장은 “서해는 물이 빠지면 넓은 갯벌이 드러나고, 해 질 무렵에는 그 위로 석양이 펼쳐져 서정적이거나 극적인 분위기가 필요할 때 제작진이 찾는 곳”이라며 “같은 장소라도 물때에 따라 풍경이 완전히 달라지는 만큼 촬영지를 소개할 때 물때와 계절별 일몰 시간까지 반드시 함께 안내한다”고 설명했다.

최근에는 현대적인 시설물이 화면에 잡히지 않는 자연 그대로의 갯벌과 해변을 찾는 제작진도 늘고 있다. 특히 최근 2~3년 사이 사극 제작진을 중심으로 사람의 손길이 덜 닿은 공간을 찾는 문의가 이어지고 있다고 한다.

김 팀장은 “촬영에서는 아무것도 없는 자연 상태의 공간을 선호해 최근에는 원형이 잘 남아 있는 외진 해변이나 갯벌을 찾는 경우도 많고, 사극에서도 이런 장소를 찾는 수요가 생겼다”며 “서해는 조금만 시간이 지나도 물 상황이 크게 달라져 촬영하기 까다롭지만 시간과 물때가 잘 맞으면 다른 해변에서 볼 수 없는 아름다운 장면을 담을 수 있다”고 했다.

■ ‘세계자연유산’ 꿈꾸는 인천 갯벌

하나개해수욕장에 썰물로 물이 빠지면서 너른 갯벌과 해안가 기암괴석이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2026.9.1 /송윤지기자 ssong@kyeongin.com
하나개해수욕장에 썰물로 물이 빠지면서 너른 갯벌과 해안가 기암괴석이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2026.9.1 /송윤지기자 ssong@kyeongin.com

‘날것의 풍경’으로 카메라 앵글에 담기는 인천 갯벌은 한강 하구와 맞닿아 있다. 인천 강화·영종·송도와 섬 지역에 펼쳐진 광활한 갯벌은 전남에 이어 전국에서 두 번째로 넓은 688.6㎢에 달한다. 국내 전체 갯벌 면적의 28.2%나 된다. 중국과 북한, 그리고 우리나라 연안으로 이어지는 서해 생태계의 중간에 자리한 데다 동아시아-대양주 철새 이동 경로에 놓여 있어 생태적 가치가 높다.

무의도가 속한 영종권 갯벌에서도 저어새와 노랑부리백로, 알락꼬리마도요, 검은머리갈매기 등 다양한 멸종위기 조류가 관찰된다. 인천 갯벌은 세계 각국을 오가는 철새들이 장거리 이동 중 쉬면서 작은 물고기와 게 등을 잡아먹는 중요한 기착지다.

우리나라 갯벌의 생태적 가치는 세계적으로도 인정받고 있다. 서천·고창·신안·보성-순천갯벌은 2021년 ‘한국의 갯벌’이라는 이름으로 유네스코 세계자연유산에 등재됐고, 올해 여수·고흥·무안·서산갯벌이 2단계 등재 구역으로 추가됐다.

인천 갯벌은 2단계 등재 대상에 포함되지 못했다. 그러나 세계유산위원회는 2021년 1단계 등재 당시 인천 갯벌을 향후 유산 구역에 포함할 것을 권고한 바 있다. 세계자연보전연맹(IUCN)도 2단계 심사 과정에서 세계유산의 가치를 지닌 다른 갯벌을 추가로 분석하고 지역사회의 지지를 확보해야 한다고 제언했다. 이를 계기로 인천에서는 강화·영종·송도 등 주요 갯벌을 3단계 확대 등재 대상에 포함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이누리 인천환경운동연합 사무국장은 “한강 하구와 맞닿아 있어 먹이가 풍부하고 생물다양성이 풍부하며, 수많은 철새가 찾아온다는 것이 인천 갯벌의 중요한 특징”이라며 “2단계 등재에는 포함되지 못했지만 앞으로 충분한 시간을 갖고 준비할 수 있게 된 만큼, 인천 갯벌의 가치를 알리고 보전하기 위한 관심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영화 속 밀물은 갯벌에 남은 흔적을 지웠다. 그러나 스크린 밖 인천 갯벌은 결코 사라져서는 안 될 우리의 소중한 자산이다. 영화와 드라마가 발견한 이 공간의 가치를 어떻게 지켜낼 것인지, 인천에는 또 하나의 ‘미결’이 남았다.

/송윤지기자 ssong@kyeongi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