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에도 신분이 있다. 취재 현장에서 자주 마주하는 일이다. 힘 있는 사람의 말은 그 자체로 뉴스다. 사회에서 손가락질받는 사람의 말은 다르다. 부당함을 말해도 먼저 합리성을 증명해야 한다. 논리에 작은 빈틈만 보여도 주장 전체가 쉽게 의심받는다. 그래서 더 정교하게 말해야 한다.
민선 9기 파주시는 최근 용주골 성매매 집결지 해체 이후 공간을 시민 공론장에서 논의하겠다고 밝혔다. 폐쇄 기조는 유지하되 성노동자의 생계 전환도 함께 숙의하겠다고 한다. 행정과 당사자가 충돌한 곳에서 대화를 시작한다는 점에서 민선 8기와는 다른 듯 보인다.
다만 모두에게 똑같은 발언 기회를 준다고 평등한 공론장이 되는지는 생각해볼 일이다. 대다수에게 용주골 폐쇄는 도시 미관과 개발의 문제다. 반면 그곳 여성들에게는 삶의 기반 전체가 흔들리는 결정이다. 무게부터 다르다.
이 대목에서 ‘적극적 조치’(Affirmative Action)가 떠오른다. 미국 유명 대학 입시에서 소수자를 이 엘리트 선발 체계에 얼마나 편입시킬지를 두고 오래 논쟁이 됐다. 특혜 논란을 거치며 어느새 낡은 단어로 전락했다. 다수의 결정이 누군가의 삶을 바꾸는 용주골에서 새삼 본래 뜻이 선명해진다. 정책의 영향을 가장 크게 받는 이에게 공론의 조건을 같이 정할 몫을 주는 일. 오히려 이런 현장에서 제 의미를 찾는지 모른다.
용주골 성노동자 여성들이 이 공론장에 참여할 수 있어야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성매매의 불법성과 그곳에서 살아온 이의 인권은 동시에 존재해 왔다. 이들의 말이 주변부에 머문다면 공론의 정당성은 흔들린다. 어느 한쪽만 떼어내도 실체는 잘려나간다.
법적으로 옳은 결론과 한 인간을 대하는 방식은 늘 같지 않다. 동시대 다수에게 이 공간을 없애는 것은 타당한 일로 보일 수 있다. 하지만 한 시대의 보편적 감정이 훗날에도 같은 이름으로 남는 것은 아니다. 백 년 뒤 사람들은 무엇을 물을까. 가장 많은 것을 잃은 이에게 당시 사회가 얼마나 말할 자리를 충분히 마련해 줬는지부터 묻지 않을까.
/유혜연 사회부 기자 pi@kyeongi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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